순한 아이의 가슴으로 사유하다

윤두현(미술비평)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계속해온 드로잉 작업들을 소개했다. 이로써 작가는 비디오 플레이어의 ‘잠시멈춤(pause)’ 단추를 누르듯 치열한 몰입과 전진으로부터 돌연 빠져나와 스스로를 작업 안으로 이끄는 어떤 힘의 실체를 찬찬히 재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서 작가가 확인하는 힘의 실체란 곧 작가 자신 나아가 우리가 현재 살아내고 있는 삶 그 자체다. 그리하여 그것은 동시대 우리들의 숨 가쁜 삶에 보내는 ‘잠시멈춤’ 신호이기도 하다.

허윤희는 작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목탄 드로잉 작업을 계속해왔다. 캔버스 위에 유채 물감과 목탄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요즘의 작업 역시도 드로잉의 연속이며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작업의 주요 수단으로 삼고 있는 드로잉과 목탄은 무엇보다도 작가 고유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특정한 여과 없이 쏟아내도록 하는데 적절한 장치로써 선택되었다. 종이, 벽, 캔버스 그리고 일기장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남겨진 그의 드로잉들에는 존재에 대한 소박하고도 애틋한 시선이 담겨있다. 이런 이유로 목탄의 검고도, 거친 질감에는 인간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어떤 원형적이며 보편적인 상실이나 고독이 담겨 있으면서도 동시에 삶의 생동하는 뜨거움이 배어있다. 그곳에서 자연, 생명, 모성, 갈망, 외로움, 상처 등은 한데 어우러지고, 그럼으로써 포용된다.

직접 쓴 시와 몇몇 드로잉 작품의 제목으로도 쓰인 ‘목마름’이라는 단어는 작업 전반에 걸친 작가적 관심을 잘 대변해주는 말이다. 목마름이란 우선 그리기에 대한 갈증이며, 이로써 ‘나와 우리’가 생의 골목골목에서 느끼는 어떤 근원적 갈구 혹은 살면서 얻은 이런저런 생채기들을 어루만지고자 하는 마음의 표출이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서의 목마름을 단지 화면에 그대로 옮겨놓음으로 말미암아 은유와 상상의 여지를 스스로 제한하는 우를 결코 범하지 않는다. 게다가 상실 그 자체로서의 삶에 대한 긍정의 시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잿빛 삶과 일상에 푸른 나무를 심고, 맑고도 깊은 우물을 연다. 더욱이 작품 속의 이야기들이 작가의 내면과 일상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감상자와의 직접적이며, 흥미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가장 큰 힘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삶을 담아내기 위해 뭔가 거창한 이야기내지 사건을 다뤄야만 한다는 쉬 뿌리치기 힘든 유혹을 적절히 피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순한 아이의 가슴으로 생각하고 표현한다. 멀고 긴 여행의 경험으로부터 모성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내고,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살고 있는 건조한 도시로부터 부재하는 자연과 생명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이런 이유로 작품들에 담긴 상상력이란 어쩌면 소소하며 사사롭기까지 하다. 슬퍼하면 안아주고, 그리움에 몸서리치면 손을 내밀어 줄 뿐이다. 내밀어 줄 뿐이다. 그곳에서 사람은 ‘남과 여’, ‘있는 자와 없는 자’, ‘흑과 백’ 등의 어떤 구별 없이 다만 하나의 원형 그 자체로만 존재한다. 또한 자연과 사람 역시 자연히 하나다. 즉 나무가 사람이고 사람이 나무다. 그리고 이런 원형적 사유는 그저 무심히 생겨나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모든 것을 품어내는 생의 원천이자, 풍요로운 은유와 상상의 시원이 된다.

멜로드라마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흔히 진부하다. 그렇지만 정작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한다. 왜냐하면 삶이 계속되는 한 그것은 늘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허윤희가 다루고 있는 ‘삶’ 혹은 ‘존재’라는 주제 역시 그런 면에서는 진부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 그렇기 때문에 늘 예술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거나 있어야만 하는 화두다. 관건은 내용의 진부함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허윤희의 작품들은 삶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과도하게 높거나 무겁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은유의 묘미를 진솔하게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제의 진부함이 결코 내용의 진부함과 같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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