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무, , 그리고 새가 되어….

허윤희와의 대화

심은록 (미술비평)

개나리, 철쭉, 벚꽃 등으로 화려한 4월의 어느 날, 허윤희 작가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다.  그가 작업을 하고 있는 벽 위쪽 한가운데에는 라틴어로 “AMOR FATI”(運命愛)라고 크고 강하게 적혀 있다. “니체의 글을 읽으며 힘을 얻는다”고 작가는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Amor fati는 ‘삶’이 아니라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주어진 삶에 복종하라는 ‘운명론’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운명 속에서도 창조적이고 적극적이며 춤추며 살라는 이야기이다.

심은록(SIM Eunlog, 이하 Sim). 이번 전시 제목이 ‘새의 말을 듣다’인데, 작가의 예술에서 새는 어떤 의미인가요?

허윤희(Yun-hee HUH, 이하Huh). 새는 제가 지향하는 존재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가볍고, 경계가 없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말하지요. 과거의 저는 무겁고, 어둡고, 슬픈 세계를 동경했다면, 이젠 가볍고, 밝고, 기쁜 세계를 지향합니다.

Sim.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이 모두 목탄 드로잉인데, 목탄으로 작업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Huh. 목탄은 나무를 태워서 만들죠. 자연에서 온 것이라 친근하고 거부감이 들지 않아요. 도구 없이 손으로 직접 그리기 때문에 더 신체적이고 직접적인 느낌이 들어요. 기술적으로는 고치기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어서 실수가 허용이 됩니다. 실수를 해도 마음에 들 때까지 지우고 고쳐나갈 수 있어요. 그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지워도 어쩔 수 없이 흔적은 남는데 그것이 모이면 오히려 작품이 깊어져요. 실수를 하면서 길을 찾아가는 인생과도 같죠. 목탄은 먼지의 속성이 있기도 한데 언젠가는 사라지는 유한한 인간의 삶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Sim. 작가님의 작품에서 ‘물’을 자주 마주칩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예외는 아닌데요. 언제부터 물을 그리셨나요?

Huh. 독일에서부터 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언어도 잘 안 통하고 타향 생활도 익숙하지 않아서, 심적으로 목마름을 느낄 때 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숲 사이로 호수를 만났습니다. 호수는 물이 넘칠 듯 가득 차 있었고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어요. 그 물을 깊이 들이마시고 싶고, 아예 그 안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지요.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 때문에 차마 물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았어요. 작업실에 돌아와 손으로 물을 마시는 장면, 물 속에 침잠해 있는 장면, 나무 뒤에 숨어서 물소리만으로 타는 목을 달래는 장면 등 다양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물은 또한 제게 근원이기도, 고향이기도, 또한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배는 근원 가까이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Sim.  하이데거가 노발리스를 자주 인용하며 말했던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이나  ‘귀향’ 의 뉘앙스도 다소 느껴집니다.

벽화 작업도 하고 또 종이 위에도 작업을 하는데, 벽에 직접 그릴 때와 종이에 작업할 때의 차이가 있나요?

Huh. 벽화는 마치 몸 자체, 피부에 문신을 새기는 것처럼 어떤 부딪힘이나 직접적인 느낌이 들어요. 벽이 딱딱하기 때문에 선을 그을 때 저항적인 느낌 또한 강하게 듭니다. 반면에 종이 위에 작업할 때는 종이가 부드럽게 받아주는 느낌이 들어서 더 편안한 마음이 들어요. 또한 벽화는 대부분의 경우에 전시가 끝나면 지워지니까, 여기 이 순간이라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되며, 사라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지요. 하지만 한 순간 속에도 영원이 들어있죠. 역설적이지만, 영원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순간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Sim.  신체 전체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나무가 신체 일부와 직접 연결되는 것도 많습니다. 나무뿌리나 나뭇가지와 발, 나뭇가지와 핏줄 등이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끼치며 변화도상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 작품에는 ‘손’이 더 많이 보였다면, 지금은 ‘발’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Huh. 저는 요즘 발의 의미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은 내가 걸어온 삶의 흔적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진실하고 정직한 느낌이 듭니다. 발은 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고, 대지 위에 서있는 것이고, 동시에 우주와 대면하며, 춤추고 날아가고 싶은 욕망을 지닌 것이기도 합니다.

Sim. 작가는 1995년에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2004년에 귀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작업할 때와 비교해서 주제가 많이 바뀐 것 같네요.

Huh . 독일에서는 제 내면을 바라보며 저 자신과의 대화를 주제로 삼았다면 한국에 와서는 사회와 자연으로 좀 더 확장되었습니다.

Sim. 작가의 독일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별이 보입니다. 언제부터 별이 등장하게 되었나요?

Huh. 2011년 후쿠시마 대지진 당시 원전사고에 관한 그림을 그렸는데요, 별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고가 나기 전날 밤 별이 유난히 밝게 빛났다고 합니다. 화면 밑에 쓰나미가 닥치는 마을 풍경을 그리면서 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Sim. 예전에는 작은 조각배에 탯줄이나 꽃이 담겼다면, 이번 작품<마을>에는 배 안에 마을이 담겨있습니다. 특정한 장소를 모델로 그린건가요?

Huh. 목포의 구시가지, 온금동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리게 되었습니다. 산 위로 마을이 쭉 전개되고, 여기저기 바위 위에 선인장 더미가 있었어요. 척박한 바위 위에 고운 꽃을 피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인장의 옹기종기 정다운 모습이 마치 또 다른 마을 같았습니다.

Sim. 작품<마을>과는 달리 배 위에 빌딩을 그린 작품<도시>에는 어떤 의미를 담고 싶었나요?

Huh 척박한 땅에서도 꽃을 피우는 선인장 더미를 크게 그려서 붕괴된 도시의 공동체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을 담았습니다. 배는 어둠을 뚫고 별들로 향하는데 밤하늘의 별들은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을 의미합니다.

허윤희 작가의 예술에서는 ‘변신’이 꾸준히 전개 된다: 나무가 손이 되고, 얼굴이 되고, 다시 리좀(rhizome) 같은 형태의 나무뿌리나 나뭇가지가 되었다가, 손이나 발의 핏줄이 되었다가, 배추가 되었다가, 발이 되었다가, 새가 되기도 한다. 예술을 통해, 그는 좀 더 멀리 별 사이를 날 수 있기 위해, 좀 더 가벼워지기 위해, 춤추기 위해 새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변신은 매번 완벽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신의 도상에 있다. 변신의 ‘도상’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주어진 존재로서의 ‘운명’을 그의 예술을 통해 창조적으로 사랑(Amor fati)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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