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함께 드로잉하기

백지숙(평론, 기획)

목마른, 검은 물

허윤희 작품에는 물이 많다. <목마름- 물을 보네>(1997)는 독일 유학 시절에 작가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우연히 숲 사이에서 호수를 발견하는 장면을 그린 드로잉 작품이다. 그런데 그림 속 나무는 물론이고 나무와 일체가 되어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에게서도 생명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목탄으로 가늘게 반복되는 선으로 뒤덮인 호수에는 물기가 없다. 목마름 연작에 등장하는 형상들은 물기라곤 없는 물을 마시고 그 물속에 가라앉고 물을 끌어당기고, 무엇보다 물을 생각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은유로서 물은 강력하고도 다채로운 문화 심리적 연상의 기술을 유연하게 제공한다, 목마름 연작에서 물은 해갈되지 않는 근원적인 갈증을 표상하듯 탯줄, 뿌리, 집 등의 도상을 휘감아 흐르며 갈급함의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의 질료적 성질은 도상이 함축하는 개념에 대한 이해 방식을 구성하며 개인적인 동시에 집합적인 상상과 뒤섞인다. 그리하여 목마름 드로잉 연작을 한동안 깊게 응시할 때 우리 몸은 통상적인 물의 풍요로움이 이끄는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역류하여, 의식은 물론 정서와 감각으로도 거의 임사 체험을 하는 것 같다.

<목마름 – 검은 물결>(1997)에는 속이 잘 보이지 않는 검은 물이 화면 한가득 채워져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인물은 천정과 바짝 붙어 있어 폐쇄공포를 불러일으킬 지경이고 유속이 느린 검은 물속 깊이 커다란 얼굴 하나가 잠겨 있다. 가라앉아 있는 형상이 태아인지 ‘껍데기’인지 ‘지친 그대’인지 아니면 다른 그림에도 종종 등장하는 큰 얼굴인지, 하나의 어휘로 고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벽화 드로잉 <대화>(2001)에 등장하는 물 위의 반영 혹은 그림자처럼, 여러 실체로 치환할 수 있는 공동의 큰 그림자로 간주하도록 하자. 목마른 우리가 물을 마시는 대신 물이 무언가를, 예컨대 검은 그림자를, 마시는 장면은 갈증의 환상에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이다. 이 시기 허윤희의 목마름 연작에서 마른 물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로, 날마다 우리 내면에서 죽음을 삼키는 일상적 슬픔으로, 물의 질료적 상상력을 이끌고 간다.

허윤희의 물 드로잉에는 큰 얼굴처럼 동일한 도상이 여러 차례 등장할 뿐 아니라 같은 화면 구성 요소가 반복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목마름 – 검은 물결>(1997)의 구도는 <여행 – 물결이 되어>(2002)와 <숨>(2011)으로 몇 년씩 간격을 두고 연결된다 – 고여 있던 검은 물에서 물결이 일더니 점막과 만난 물이 생명을 퍼뜨린다. 세부에 관한 연구에서 출발하여 구성적 관계의 재작업으로 그리고 종종 전체의 재진술로도 진행되는 드로잉의 반복은 드로잉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특히 반복 실행으로서 허윤희의 드로잉은, 작가의 개인사이든 그를 둘러싼 시대 환경이든 아니면 예술사적 문제의식이든 간에 특정 시기의 좌표에서 회절하는 자기 전개로서, 일종의 시퀀스를 이룬다. 시간을 기록하는 행위로서 그의 드로잉 선은 하나의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넘어갈 때 화면 사이의 우리가 미처 알 수 없는 간격까지 매워가며 변화의 바이브를 증폭한다. 누적된 선이 도달하며 내쉬는 <숨>에는 나뭇가지를 물고 있는 인물의 배 위로 검은 물이 출렁이고 파랑이 이는 어두운 물속 깊이 손 하나가 삼켜져 있다. 시퀀스의 결말에 도달한 검은 물은 가벼워지거나 밝아지며 소생하는 대신, 의미의 풍부함으로 더욱 깊어 지기를 선택한 듯하다. 드로잉에서 드로잉이 자라나는 시간의 축적을 고려한다면 검은 물은 한층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헤엄치는 몸과 배

물을 본다는 것은 물에 들어가고 싶다는 뜻이다. <목마름- 물을 보네>(1997) 이후, 국내 신문지 위 드로잉 <항해>(2001)를 비롯해 드로잉 작품 <여행> (2002), <여행- 물결을 거슬러>(2002), <삶은 계속된다> (2006) 등 물속 크롤 스트록 동작을 가까이에서 포착한 작품이 다수 제작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들 작업에서 헤엄치는 몸은 떠나온 고향을 향하는가 하면 자유롭게 부유하기도 하며 또 다른 미래를 바라보기도 한다. 탯줄을 매달고 물속에 떠 있는 아이들(<엄마에게 1, 2> 1998)의 무시간적 유영 혹은 침잠과 비교해보면, 이 시기 목탄 스트록에는 확실히 도약과 전진의 기세가 있다. 삶이 계속되고 스트록 또한 지속되면서 검은 물은 점차 투명해진다. 드로잉은 예술가의 주관과 감정을 구성하는 내밀한 기호일 뿐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지적인 작업이다. 그와 동시에 외부를 기록하거나 그에 응답하면서 자기 인식 및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 명료하게 구축해가는 매체로 자리 잡아 왔다. 대표적으로 작가가 드로잉의 속성을 숙련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작품이 <윤희 그림>(1996)이다. 고갱의 타히티 시절을 다룬 독일어 소설책 위에 글을 입히고 기호와 그림으로 지면을 덮었던 이 작품에서는 드로잉의 실행력이 여러 화면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한편, 헤엄치는 일련의 형상들에서는 세상과 격하게 부딪혀 생긴 내상과 새로운 각성을 실천적 선으로 어떻게든 구현하려는 의지가 지면마다 응축되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윤희 그림>에서 시를 낭독하는 작가의 육성이 산문적으로 들린다면, 오히려 헤엄치는 몸의 드로잉이 시로 읽힌다.

동일한 시기 화면에는 물 위로 배들이 이동하는 상황도 펼쳐진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2000)와 <여행 – 배 위에서>(2002)에서 노 젓는 사공이 있던 배는, 흔드는 손들로 틈새 없이 가득 차 가라앉기 직전이거나(<여행 – 떠남> 2002) 말려 있는 탯줄을 실은 채(<여행 – 탯줄> 2002) 물 한 가운데로 흐른다. 일견 이들은 망자의 세계로 인도하는 카론의 배 같은 신화적 원형이나 유령선 류의 전설 모티프를 연상시킨다. 그러다 2010년대에 이르면 작은 조각배가 마을과 도시를 실어 나르는 화물선 규모로 커지며 컨테이너의 의미 작용이 확연히 달라진다 (<도시1> 2016, <마을> 2016). 특히 후쿠시마 별밤 아래 격랑을 가로지르며 재난에 봉착한 도시와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동시에 운반하는 배(<도시2> 2016) 그리고 가장 최근의 예로, 녹아내리는 빙하가 둥둥 떠 있는 물 위로 빌딩과 주택이 빼곡한 산과 나무들을 통째로 옮기고 있는 배(<빙하와 도시> 2025)는 병원선과 구조선 기능을 당대적 긴급함으로 투사하고 있다. 바람이 일으키는 표면의 물결에서 조석의 깊은 출렁임으로 물의 동세도 함께 달라진다. 되돌아보면 작은 배 한 척이 나무에 핀 꽃-손과 누워있는 큰 얼굴 그리고 이를 둘러싼 커다란 광배를 나르고 있는 벽화 드로잉 <오두막>(2001)은 이 컨테이너의 운명을 일찌감치 예견한 한 장의 ‘타로’ 같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를 그린 일련의 목탄 드로잉에서 작가가 화면 위에 남긴 접촉의 강도와 리듬은 추후에 이를 보는 사람도 곧바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다. 배를 둘러싼 물의 움직임을 사방으로 확산시키는 드로잉 선은 주제나 대상이 표출되는 강도뿐 아니라 손동작의 자취 그리고 몸의 키네틱한 메아리에 대한 정동적 반응으로 연계되곤 한다. 허윤희의 드로잉 퍼포먼스 기록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긴 막대에 꽂은 목탄으로 긋는 가는 획은 몸과의 거리를 무겁고 강한 흔적은 손의 정지 상태를 그리고 장시간의 압력이 남아 있는 자국들은 온몸의 에너지가 실린 근접성을 각기 전달한다.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나의 정원>(2016)은 균질한 강도의 가늘고 섬세한 획으로만 완성되어 드로잉의 시간성과 이에 수반되는 촉각적 경험을 돌연 멈추게 한다. 흐드러진 꽃과 수풀이 올 오버 패턴으로 200호 크기 화면을 채우고, 가운데 텅 빈 배 하나가 떠 있다. 배는 안팎이 모두 블랭크 처리되어 부피가 사라진 불투명한 막으로 보인다. 막 안으로 바깥의 물이 서서히 스며들고 푸르고 싱싱한 이파리들이 쑥 자라 배 주변을 둘러싸면, 비로소, 허윤희가 물을 안아 담은 배추가 탄생한다.

배추

배추 그림은 그의 글 「배추」(2006)에 적혀 있듯이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가 동네 시장에 수북이 쌓여 있던 싱싱한 배추 더미와 마주친 ‘사건’에서 비롯했다. 그 순간 작가는 밖에서만 찾던 물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라고 쓴다. 그가, 배추가 또는 배추 그림을 보는 우리가 물을 동시에 안아서 품게 되는 이 드로잉을 통해, 몸과 분리되어 수 세기 동안 밖으로만 흘러 다녔던 근대적 물의 상상력이 요동친다. 사실, 물이 추상화된 화학기호로 표기되고 관리와 감상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물이 대상화된 자연성의 요소로 정착된 시기가 서구의 18세기일텐데 지구의 장구한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근대적 물의 제도화는 물을 측정하고 통제 가능한 자원으로 분류하면서 실제적인 물 위기를 가속했고, 마침내 행성의 파국을 예고하는 가장 확실한 신호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물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고 격리함으로써 얻은 자율성의 환상을 통해 물을 통제하고 관상해야 할 대상으로 상정한다. 그러므로 작가가 물이 안으로 들어왔다고 할 때, 이는 개인의 감각적 체험이나 의식의 전환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막혔던 물이 순환을 재개하는 순간, 억압된 유동성과 공생성이 회복되며 물에 대한 새로운 상상의 물꼬를 트는 특별한 장면으로 뇌리에 기억될 만하다.

모든 생명체는 물로 되어 있다. 물에서 나와서 물로 돌아가며 어떤 것도 물을 영원히 봉쇄할 수는 없다. 아스트리다 네이마니스는 이런 물의 순환 속에서 우리 몸이 다른 생명, 대기와 대지, 사물 등 행성적 존재인 물의 몸들bodies of water과 얽혀든다고 말한다. 물의 몸들로서 우리 또한 세계와 서로 스며들어 흘러가며, 관계와 감응, 젠더와 생태, 감정과 기억, 윤리와 기후가 교차하는 존재론적 조건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검고 무거운 물에 물결이 일고 파도가 치더니 배추 몸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 물은 고요하고 맑아진다. 그렇게 추상도가 높아지려는 찰나, 속에 고였던 물은 다시 바깥으로 내뿜어진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화구 속 물로, 창공에 비행기가 떠다니는 바닷물로 혹은 바다로 통하는 섬 안의 물로 자유자재로 분출하며 다채로운 배추 풍경을 생성한다. 간혹 이 풍경은 밥그릇 안의 산세나 백두산 정상의 천지로 절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날아가고 시들고 합체하고 변신하는 드로잉의 ‘애니메이션’에서 물을 안은 배추는 작가의 경험과 자각이 체현된 식물 변형태에 그치지 않고, 물의 몸들을 상징하는 하나의 캐릭터로 생명력을 갖는다. 배에서 배추로 이어졌던 물의 드로잉이 배추 안팎을 통과하고 넘나들며 인간 너머more than human 물공유지hydrocommons로 흘러들 때, 배추 캐릭터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가르는 인류세의 현재 속으로 다공적 물길을 낸다.

허윤희는 배추를 크고 작은 드로잉과 벽화 드로잉 그리고 페인팅으로도 여러 점 그렸다. 그중 아크릴 물감으로 바탕이나 배경을 칠하고 목탄 드로잉을 한 작품들에서는 배추 형상 못지않게 색채 자체가 부각된다. 화면 위 푸른 색조는 물의 체현이 전달하는 투명하고 부유하는 감각, 가라앉고 머무르는 위치, 씻어내고 더럽히는 성질 등을 물질적으로 전달한다. 푸른 배경 가득하게 큰 배추 하나를 그려놓고 하늘 구석에 비행기를 작게 삽입한 〈푸른 배추〉(2017)에서는 푸른색이 바다와 창공, 배추 줄기의 수맥 그리고 배추가 안은 물의 파동을 관통하는 감각적 매질로 작동한다. 또 위치에 따라 번지듯 흐르는 푸른 색조의 미세한 변화는 우연성과 차이의 순간을 드러낸다. 물을 대신하는 색상이 ‘블루’라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다. 하지만 블루 아크릴 물감이 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과 결합해 한지韓紙 화면 전체를 구축하는 순간, 이는 그림과 조우하는 우리 몸에 특정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의미와 질료 또는 문화와 자연이 서로 얽혀드는 물질-기호적 장을 형성한다.

개가시나무 뒤 빙하

2022년, 작가는 작업실과 생활 터전을 서울에서 제주로 옮긴다. 이후 작업에서는 <녹색 배추>(2020)에서 쓰였던 초록 아크릴 물감의 채도가 좀 더 높아지면서 푸른 색조의 뒤를 이어 물의 또 다른 잠재성을 가시화한다. 대표적으로 <개가시나무는 살아있다>(2025) 연작에서 초록 아크릴은 물과 빛이 결합한 광합성의 생명력을 전달하며 물질-기호적 국면을 드러낸다. 제주 이주 후, 자주 산책 하던 작업실 근방의 제주도립 곶자왈공원에서 작가는 개가시나무를 만난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인 개가시나무는 자생하는 주변 지역을 멸종위기종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개발을 막고 곶자왈을 지켜낸 위용으로 유명하다. 이전에도 허윤희는 멸종위기식물 <사라져 가는 얼굴> 연작을 제작했고, 관객들은 한국 멸종위기 생물 276종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퍼포먼스에 동참하기도 했다(『사라져 가다』, 2020, 예술공간 수애뇨339). <사라져 가는 얼굴> 연작은 대부분 종이나 캔버스에 ‘총천연색’으로 그린 회화 작품으로 장례 전에 미리 준비해두는 영정 형식처럼 구현되었다. 그에 비해 한지 위에 초록 아크릴 물감을 칠하고 목탄으로 드로잉한 개가시나무 연작은, 나무 몸통을 클로즈업하고 크롭해 전면에 힘있게 배치하여 큰 그림은 가로 6미터가 넘는다. 제주 곶자왈이라는 문화 자연, 30미터 높이에 달한다는 개가시나무의 위풍 그리고 공생하는 식물군과 자생 수종, 돌, 이끼의 원시성을 고스란히 살리기 위한 방도일 테다. 개가시나무와 멸종위기식물 작업으로 둘러싸인 초록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애도와 추모의 정서 너머로 보호와 위로 그리고 갱생의 에너지를 식물이 광합성 하듯 가까이서 쬐는 느낌을 받는다. 개가시나무가 살아있는 한, 나도풍란도 죽백란도 가시연꽃도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 같다. 아니 되려, 이 공간에서 영정사진이었던 <사라져 가는 얼굴>이 돌사진으로 환생하는 듯하다.

그런데, 개가시나무 연작 배경에는 개가시나무와 콩짜개덩굴이 뒤엉켜 뻗어나가는 초록색 기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형세가 있다. 녹아내린 크고 작은 빙하 조각들의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2020년부터 시작된 빙하 드로잉의 후경에는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빌딩과 아파트 단지 혹은 거대한 풍란과 높이 솟은 침엽수림 등이 산줄기와 몽타주 되어 있고, 전면으로는 빙하 조각들이 물 위를 떠내려가고 있다. 빙하 드로잉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화면 가운데를 수평으로 가르고 있는 지대이다. 어떤 그림에서는 융해된 빙붕의 단면이기도 하고 다른 그림에서는 해수면이 상승하며 사라진 지대의 흔적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부분을 목탄으로 그린 뒤에 지우고 입히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구현했다. 드로잉에서 지워진 흔적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와 펜티멘티pentimenti의 두 기능 그러니까 삭제하고 덧입히는 과정의 기록인 동시에 수정과 교체의 의도까지 포함하는 자기 제작의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빙하 드로잉 연작에서 융해된 빙붕과 해수면 상승 지대는 작업 방식으로 치자면 팔림프세스트에 가깝겠지만, 인간 너머로 연결된 모든 존재에게는 끔찍한 오류와 뒤늦은 탄식의 펜티멘티에 다름 아니다. 이탈리아어로 후회를 뜻한다는 이 기법은 고전에서 당대에 이르기까지 드로잉과 페인팅에서 자주 쓰여왔지만, 이제 허윤희의 빙하 드로잉에서는 인류세를 해킹하는 물의 시대 곧 하이드로신Hydrocene이 남긴 자국이 되었다.

빙하 드로잉의 스케일이 커지면 화면을 수평과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또 다른 띠가 나타난다. <개가시나무는 살아있다 1>의 초록 바탕에서도 눈에 띄었던, 한지를 이어 붙인 자국이다. 허윤희는 2000년부터 한지로 작업을 했는데 200호가 넘는 크기가 유용해서 종종 양탄자처럼 말아 한국에서 독일로 직접 운반해 갔다고 한다. 목탄이 한지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느낌이 잘 맞아 꾸준히 사용했지만 최근 들어 한지 장인들이 사라지고 가업이 끊기면서 큰 한지를 구하기 어려워진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대형 드로잉 작업에서는 종이를 이은 자국도 화면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아마도 전시장 벽에 낱장으로 탈착할 때마다 이음새가 변하는 지점까지 고려했을 것이다. 지역의 문화 경제와 관련된 한지 이음매는, 빙하 드로잉의 펜티멘티와 공명하며, 기억의 봉합선이자 시간의 물질적 접합 면으로 작동한다. 물은 얼음이 될 때 다른 대부분 물질과 달리 부피가 줄지 않고 결정 구조로 인해 생기는 분자 간 거리 때문에 오히려 늘어난다. 얼음은 액체 상태의 물보다 더 많은 공간 – 그리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시간 –을 아카이빙하는 스토리텔러이다. 행성의 아카이브인 빙하는 여러 시대를 압축해서 같은 자리에 보존한다. 한지 위 빙하 드로잉은 물 위의 살아 있는 지도인 양 생활사적인 위치와 관련된 기억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얼려 놓은 듯하다. 빙하가 ‘자연스레’ 녹으면 물속의 유기체들이 되살아나 오래전 시공간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레테의 강을 건너면 므네모시네의 물이 있듯이, 레테가 씻어 없앤 역사는 물속에 언제나 보존되어 있으며, 므네모시네의 물로 회복될 잠재성을 지닌다.

한편, <빙하 2> (2020) 화면 오른편 구석에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아주 작은 인물이 서 있다.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느라 관람자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예술가-방랑자Rückenfigur는 허윤희의 빙하 그림에서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가. 구석 자리에서 그는 빙하 지층대의 ‘북반구’에 위치한 대도시를 바라본다. 마천루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산줄기로 이어지고 바로 앞까지 커다란 빙하 조각들이 떠내려오는 광경에 그는 압도당할 지경이다. 이른바 자본의 흐름은 물의 움직임을 쉽사리 전유한다 – 자본이 지배하는 지구에 사는 생명체들은 거대한 투자 파도 위에서 난파선의 부유물이나 해변의 쓰레기가 되어 무력하게 떠밀려 다닌다. ‘유동하는’ 자본이 초현실적인 속도로 행성을 가열하고 빙하의 해동을 가속하면서, 물로 이루어진 세계와 그 기억의 아카이브는 복구 불가능하게 삭제당할 태세이다. 그러므로 인류세의 작은 예술가-방랑자들이 맞닥뜨리는 가장 극적인 풍경은 숭고한 파국의 현장보다는 차라리 기억의 완전 삭제 상태일 것이다. 이를테면,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던 국립현대미술관의 거대한 벽화(<빙하가 녹고 있다>, 2021)를 전시 종료 후 흰 페인트로 말끔히 도포해버렸을 때의, 그 커다란 텅 빔tabula rasa.

해 돋는 바닷속 평화

텅 빈 흰 캔버스 위에 요즘 허윤희는 아침마다 붓을 들어 뜨거운 해가 솟아오르는 바다를 그린다. ‘선 없이는 하루도 없다. Nulla dies sine linea’. 플리니우스 박물지에 나오는 이 문구는 글쓰기와 그리기 모두에서 지켜야 하는 원칙으로 전해지는데, 허윤희에겐 이천여 년 전 이 가르침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싶다. <관집 일기>는 2001년 관집을 지으며 적은 일기이고, <나뭇잎 일기>는 2008년부터 2020년까지 하루의 산책길에서 주워온 나뭇잎을 그리고 글을 적어 넣은 일기이다. 제주도에서 시작한 <해돋이 일기>는 그림 사이사이 단상을 적어서 같이 전시하기도 한다. 2023년 10월 16일 시작해서 2025년 10월 17일에 258점이 되었으니 2년간 대략 3일마다 한 점씩 그린 셈이다. 이 작업에 관람객들이 감동하는 이유는 물론 개별 작품이 주는 쾌감과 환희 때문이겠지만, 작가의 작업 과정에 대한 이해나 공유와도 분리하기 어렵다. 자기 수련과 같은 매일의 열심, 고요한 새벽에 도달하는 무아의 경지와 명상의 순간, 유화라는 느리고 더딘 매체로 광대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을 전달하려는 ‘무모한’ 시도 등 작가로서 그의 성실하고도 용감한 태도에 사람들은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일기 형식이 그렇지만 허윤희는 시와 에세이 등 다른 텍스트를 통해서도 작업의 동기와 제작 이유, 과정, 소회 등을 밝힌다. 작업 전 과정을 그대로 노출하며 벽화 드로잉을 실연하고 동영상으로 기록해서 웹사이트와 소셜미디어로도 공개한다. 2025년 개인전 『가득 찬 빔』(대구미술관)에는 해돋이 연작의 제작 기록 영상 <계절 의식>(제작 김그레이스)과, 작품 제작 과정을 영화로 재해석한 <빛을 향한 수행>(감독 이승준)도 상영한다. 넓은 전시장에서는 작업과 작가, 문맥과 텍스트, 작품과 도큐멘테이션, 기록성과 수행성의 제 영역이 서로 넘나들며 관객들 동선 사이로 배어들고 있다.

이른 새벽 제주도 중문 남쪽 바닷가에서 두세 시간 동안에 일출 풍경을 그려내는 해돋이 연작은,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46x61cm 캔버스에 그린 유화 작품이다. 바다와 하늘, 물 위로 떠오르는 태양, 바위와 섬, 산 등이 그려져 있고, 작품 캡션에는 연번과 제작연월일이 적혀 있다. 그린 시간도 따로 적어두었으리라 추측한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풍경의 프레임이 이동하고, 물과 빛, 대기와 대지의 색채가 변해가는 타임라인을 따라가며, 그간 허윤희 작업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색상이 모처럼 화사하게 만개한다. 외광이 핵심적인 야외 사생이지만 멀리 보이는 고근산과 범섬을 기점으로 실제 장소에 기반한 원근감도 또렷해졌다. 작품이 제작되는 사계절을 동영상으로 기록한 <계절 의식>에서는 작가가 작업하는 현장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 허윤희는 손과 눈을 실시간으로 조율하며 순간마다 변화하는 바다 풍경을 붓으로 따라잡는다. 밑그림이나 스케치도 따로 없고 목탄 드로잉에 자주 등장하는 의도적인 삭제나 수정의 흔적도 없이 극도로 집중해서 거의 단번에 그려낸다. 완성된 그림에서는 붓 스트록으로 짧고 빠르게 이어지는 색채의 궤적들이 가장 눈에 띈다. 특히 물에 반사되어 움직이는 태양 빛은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바다 표면의 질감을 강조하며 화면 전체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한편, 해돋이 장면을 구성하는 또렷한 터치와 진동은 이 연작이, 몇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드로잉에서 회화로의 전격 이동보다는 드로잉 선의 회화적 번역으로 간주하게 한다. 악기를 누르는 손가락이나 발레의 발동작인 양 그의 회화적 붓 터치는 예의 드로잉 퍼포먼스적 특징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그간 허윤희의 벽화 드로잉 퍼포먼스가 한 장소에서 공유하는 일정한 시간에 방점이 찍히는 작업이었다면, 해돋이 연작은 한 장소에서 매번 다른 시간에 벌어지는 퍼포먼스라 할 만하다. 드로잉 선의 시간성과 관련해서, 앞엣것이 롱테이크 시퀀스라면, 나중은 프레임에 프레임을 쌓아가는 다중노출과 같다. 무엇보다 앞엣것이 마른 드로잉이라면 해돋이 연작은 젖은 드로잉이다. 목탄과 오일페인트라는 물질의 대조를 넘어서, 이전의 작업이 물을 보고 물을 생각하는 그림이라면 지금 경우는 작가가 물속에 들어가 물과 함께 생각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계절 의식>에서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이사이,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프리 다이빙을 한다) 해돋이 연작은 바다를 특정 소재나 제재 혹은 일관된 주제 보다는 작업의 가장 주요한 협업자로 여기며, 물과 대화적이고 비판적이며 호기심 어린 방식으로 맺는 특수한 관계의 산물이다. <해돋이 일기> 146점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전시 공간으로 들어설 때, 그러므로, 우리는 해 돋는 바다들을 바라보며 서서히 물에 잠긴다. 바다 표면을 지나 바닷속으로 잠수하는 이 퍼포먼스의 시간에 동참하면서, 우리 또한 위도 33.234230984046725, 경도 126.4336253576717에서 출발하여 제 각기 몸으로 알아가는 수로를 탐색하게 된다.

멀리는 태평양으로 이어지고 주상절리로 유명한 아름다운 바닷가, 일출 명소로 이름난 그곳에서 스마트폰으로 해돋는 장관을 빠르게 수십 장 찍어대는 대신, 허윤희는 아무도 없는 새벽에 나가 해가 솟아오르는 광경을 반복해서 그린다, 이 작업이 풍경의 재현이나 재해석을 추월한다면, 그 수행적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매일의 해돋이 캔버스는 새로운 빛과 습도, 염분, 바람을 받으며 세상에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착상하고 태동시킨다. 일출이 일몰까지의 하루를 이미 품고 있듯이 말이다. 반복해서 그리는 해돋이 드로잉은 복제나 재생산이 아니라 매일 다른 탄생이다. 기상과 시야는 물론 신체 리듬의 차이로 인해 작가는 매번 분화와 생성의 경로를 선택하고, 그렇게 탄생하는 작품군은 비동일하게 사방으로 가지를 치며 뻗어나간다. 물안개와 바다 소금기, 빗물, 새와 벌레의 배설물 그리고 허윤희의 땀과 호흡도 그림 속에 물질로 섞여들면서, <해돋이 일기>는 말 그대로 물의 몸들을 횡단하는 신체transcorporeality의 교환 ‘일지’가 된다. 나아가 이 일지는 더욱 잘 그린 그림, 완벽히 마무리된 성과를 지향하는 근대적 시간관 대신, 조석간만의 비직선적이며 주기적인 시간성을 따른다. 그 시간 속에서 해돋이 연작의 젖은 드로잉은 완성보다는 지속과 돌봄의 관계를 형성하며, 일회성 드로잉 퍼포먼스 대신 퍼포먼스 드로잉을 연달아 산출한다. 요컨대, 허윤희의 <해돋이 일기>는 동일한 풍경을 관조하며 반복해서 숙련하는 예술 활동의 결과물에 그치지 않고 물과 몸, 시간이 서로를 침투하고 연결하고 분화시키는, ‘바다 퀴어링’이 날마다 낳는 산물이다.

대구미술관 벽화 드로잉 퍼포먼스 <물의 평화>(2025)에서 물에 떠 있는 여인은 얼핏 햄릿의 오필리아를 연상시키지만 실은 허윤희의 담쟁이 여자다. 2012년 드로잉 <자화상>, <호수>, <식물 사람> 그리고 2017년의 회화 <담쟁이 여자>에도 출현했던 형상이다. 담쟁이덩굴은 다른 작품에서 새의 날개나 나무 몸통에도 착상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인물과 흡착하여 공생하는 몸을 이루고 있다. 담쟁이 여자는 초창기 드로잉에서 두드러졌던 탯줄의 모성 회귀로부터 점차 벗어나, 배의 양막과 배추의 양수를 통과하며 물이 지닌 생성과 공생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흡수한다. 그리고 콩짜개덩굴이 뒤덮은 개가시나무와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물의 몸들과 얽히며, 퀴어 친족성과 증여의 윤리를 실천하는 존재 조건에 도달한다. 이제 그는 제목 그대로 물속에서 평화롭다. 그러나 이 평화는 정지된 것이 아니다. 바닷속 평화는 안과 밖이 통하고 관과 집이 넘나들고 죽음과 삶의 경계가 섞이며 매 순간 빛과 색의 스펙트럼을 재편하는 물의 그것이다. 담쟁이 여자는 제주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어머니 바다의 양수에 뜬 채 물고기와 새들과 더불어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해돋는 짠물의 부력에 의지하여 육지의 지배적인 직립 인식 활동에서 풀려나 수평적 사유와 감각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하이드로신 예술가는 죽어가는 행성의 격랑 속에서 물의 상상력을 유지하고 부유하기 위한 도전에 응하여, 예술이 행성적 돌봄을 수행할 수 있다고 답한다.

 

미주

1)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 질료에 관한 상상력 시론, 김병욱 옮김 (서울: 이학사, 2018), eBook ed., ch. 2.

2) Deanna Petherbridge, The Primacy of Drawing: Histories and Theories of Practice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10), 94.

3) Ibid., 2.

4) Astrida Neimanis, Bodies of Water: Posthuman Feminist Phenomenology (London: Bloomsbury Academic, 2017), 19-20

5) Ibid., 63-64

6) Camilla Brundin, The Hydrocene: Ecoaesthetic Practices between Art and Water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24), 133.

7) Janine MacLeod, “Water and the Material Imagination: Reading the Sea of Memory against the Flows of Capital,” in Thinking with Water, ed. Cecilia Chen, Janine MacLeod, and Astrida Neimanis (Montreal and Kingston: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13), 45–46

8) 실제로 이승준 감독은 허윤희 작가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빛을 향한 수행> (2025)에서 16mm 필름의 다중노출 기법을 통해 일 년간의 일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4개의 채널은 각기 가을, 겨울, 봄, 여름을 나타내며, 하나의 필름 롤에 일곱 개의 촬영물을 겹쳐서, 시간과 빛의 압축된 기록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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