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은
허윤희 개인전 “날들의 피부”는 작가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중첩된 감정을 드로잉으로 얇게 펼쳐 놓은 전시이다. 작가는 매일매일 책이나 공책에 하는 소략한 드로잉에서부터 전시장 벽면을 모두 차지하는 대규모 드로잉까지 일기를 쓰듯 자신의 느낌과 사고를 꾸준하게 물질화한다. 그러니까 허윤희는 드로잉이라는 형태로 외부세계와 부대끼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통해 다시 자신의 외부를 반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허윤희의 작업에서 배, 집, 강, 태아와 탯줄 같은 이미지들은 일종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독일 유학시절 느꼈던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철학적 사유와 닿아 있다. 구체적으로 배와 강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심정을, 그리고 집은 고향을, 태아와 탯줄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본연의 모습을 각각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적인 이미지들과 더불어 허윤희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는 목탄이다. 목탄은 작가의 감정표출을 도와주는 매체인데, 이는 쉽게 지워지는 특성상 이미지의 수정이 용이하다. 따라서 빠르고 신속하게 작가의 감정을 이입할 수 있으며 수 없이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신체적 행위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해 허윤희는 드로잉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동시에 드로잉을 하는 행위를 통해 감정의 응어리를 토해내는 것이다. 허윤희의 드로잉에서 제작 과정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시장 바닥에 부러지거나 가루가 된 채 떨어져 있는 목탄의 잔재는 이러한 작업 과정을 짐작케 하는 요소이다.
허윤희는 드로잉의 일반적인 성격 곧, 즉각성, 속도감, 신체성과 같은 특성을 충분히 자기화하고 있다. 동시에 전시장 벽, 아파트 외벽 같이 보존이 불가능한 곳에 드로잉을 함으로써 사각의 화면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드로잉의 한계를 극복하고 ‘상업적인 수입을 위해 부수적으로 제작하는 작업’이라는 드로잉의 오명을 벗겨 주기도 한다. 이번 인사미술공간 전시에서 허윤희는 전시장 벽면과 계단 벽 등을 이용한 월 드로잉(wall drawing)을 보여준다. 전시장에는 허윤희가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인 배와 집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은 배는 전시장을 돌아 결국 집으로 귀의하는 구도를 갖는다. 또한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에는 더 높은 곳을 향해 손짓하는 잡초의 이미지로 관객들을 강하게 흡인한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해석은 드로잉을 단순히 벽에만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개입을 통해 공간을 통째로 새롭게 인식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