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조응하는 삶과 예술, 허윤희의 월든

미술평론가 유현주

나무로 나무를

허윤희 작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면, ‘나무로 나무를’ 그리는 예술가일 것이다. ‘나무로 나무를’은, 허윤희가 즐겨 사용하는 목탄이 나무를 태워 만든 것이어서, 자연의 어떤 대상을 그릴 때 자연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감각으로 자연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허윤희가 그리는 자연은 인간과 연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에게 상처받은 모습이다. 즉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기후변화로 사라져가는 숲,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는 빙하, 멸종하는 생물들의 자화상이 그의 그림의 주인공들이다. ‘나무로 나무를’ 그리면서 작가는 자연을 위로하고자 하며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안아주기를 기도한다. ‘자연으로 자연을’ 말하는 허윤희의 그림에서 우리는 자연과 모든 생명의 연결, 자연과 인간의 부조화를 이루게 된 현대문명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생태학적 사유의 그림자를 본다.

허윤희의 벽화 작업은 독일 유학 시절부터 이어져 왔다. 2020년 복합문화공간 수애뇨에서의 <사라져 가다>와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재난과 치유》에서 선보인 <빙하가 녹고 있다>는 생태적 주제를 선명히 드러낸 작품이다. 《재난과 치유》 전에서 허윤희는 목탄으로 녹아내리는 빙하와 빙하 위에 멸종위기 식물인 풍란을 ‘그리고 지우는’ 퍼포먼스를 했다. 허윤희는 이 지움의 행위를 ‘또 다른 출발’ 즉 태어남의 행위로 명명한다. 그는 그리기와 지우기를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소멸하고 또 태어나듯, 지우고 또 그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윤회의 일종”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전시 기간에만 볼 수 있는 목탄 벽화 작업을 통해 불교적 의미의 ‘지금 여기’를 강조”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는 현 세계의 존재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불교적 생태철학을 참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불교 철학은 그물코의 구슬이 서로를 비추고 비추어주는 연결 속에서만 무한히 빛을 내는 중중무진 인다라망(重重無盡因陀羅網)의 연기론(緣起論)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인다라망은 인간과 미생물까지 모든 생명은 연결되고 의존되어 있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모든 생물체의 세포 하나하나가 연결망을 이루고 있으며 가이아 지구도 그러한 유기적 연결체라는 관념은 인드라망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서구 생태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허윤희가 어떤 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든, 지구의 환경이 병들고 생명체들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크게 애도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작가는 <사라져 가는 얼굴>(2020)의 주인공으로 한국의 멸종위기식물의 초상화를 선보이고 관람객들과 함께 멸종위기 생물 276종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애도의 퍼포먼스를 펼쳤다. 허윤희가 멸종위기에 놓인 식물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들의 얼굴을 영정사진처럼 그리는 작업을 할 때, 그가 그린 꽃은 아름다운 정물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위로받아야 할 지구의 가엾은 가족, 오이코스(oikos)로 다가온다.

허윤희가 생태적 이슈를 주제로 시도했던 벽화 작업은 대부분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그리고 지우기’의 작업이다. 벽화를 장시간 그리고, 다시 시간을 들여 ‘지우는’ 그의 작업은 20세기 후반 환경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일부 미술가들이 재료를 인위적으로 변환하지 않고 순환하는 물질의 사용과 전시 방식을 고민한 맥락과 일면 유사성을 갖는다. 또한 그러한 지우기의 작업은 소유와 축적의 자본주의적 속성에 반하는 문화를 추구한 생태주의 미술의 흐름과도 결을 같이 한다. 생태주의를 추구한 이들의 예술은, 시장에서 상품화하기 어려운 작업을 선보였는데, 예를 들면, 이들은 대지를 캔버스 삼아 돌무덤을 쌓거나(로버트 스미슨), 쓰레기 매립지에 나무를 심거나(멜 친), 수질 오염된 물을 미술관에서 정화한다거나(한스 하케), 도시 건물의 바닥을 청소하는(미얼 래더만 유켈레스) 등, 지구의 흙, 나무, 물, 공기의 존재 가치에 시선을 모으고 일회적이며 ‘소유할 수 없는’ 작업을 시도했다. 허윤희의 지우는 행위도 자본주의의 소유 개념에 반하는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저장고에 쌓이는 잉여의 재화가 아닌, 언젠가 사라질 물질로서의 생태적 작업은 가장 간소한 삶을 꿈꾸는 생태주의자들의 삶의 방식과 맞닿는다.

삶의 예술, 나뭇잎 일기와 해돋이 일기

허윤희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가 생태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필연인 듯하다. 환경 문제를 본격적으로 작업의 중심으로 가져온 것은 그가 독일 유학(1995-2004)을 마치고 온 후부터다. 그러나 일찌감치 독일에서도 즐겨 읽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들과 한국에서 접한 <녹색평론>이라는 정기간행물 그리고 우연히 그 책의 표지 그림을 맡게 된 일련의 사건들은 작가에게 환경을 생태학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작업을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2023년 대도시의 삶에서 번 아웃이 온 작가는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서울을 떠나 제주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에서 현재까지 대자연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으며 새로운 작업과 함께 그의 생태적 사유의 예술을 이어가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허윤희의 작업이 자연 친화적인 성향을 띠게 된 배경으로, 독일 유학 시절 예술철학 교수 롤프 틸레가 운영한 남프랑스 툴루즈 근처 시골 갈란에 있는 예술 아카데미에서의 경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몇 해 여름을 그곳에서 대지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그는 예술의 이름으로 집을 짓고, 그림을 그리고, 차를 마시며 밤에 별 구경을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깊이 접했다. 당시 허윤희가 지은 <삶의 관(館) 집>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삶의 긍정성을 붙들고자 한 의도에서 시도한 작업으로, 니체주의적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정신을 보여준다. 실제로 아모르 파티가 그의 삶을 이끄는 정신의 한 축이라면, 황량한 겨울을 견디고 어김없이 싹을 틔우는, 남프랑스에서 경험한 자연의 생명력과 온기는 허윤희의 예술에 뿌리를 내린 생태적 사유의 맹아가 되었으리라.

자연 친화적인 삶을 갈망하는 허윤희가 <나뭇잎 일기>(2008-2020)를 시작한 동기는 소로의 『가을의 빛깔들』에서의 가을 단풍잎 그림책에 대한 구상과 관계가 깊다. 소로가 이루지 못한 그림책에 대한 꿈을 허윤희는 자신이 직접 이루고 싶어 했다. 소로의 『월든』이 그에게 삶의 방향을 전환케 해준 가장 의미 있는 책 한 권이라고 소개할 만큼, 허윤희의 예술은 소로의 생태적 사유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19세기 미국의 물질주의적 사고를 비판한 소로는 <월든>에서 자신이 숲속의 생활을 택한 이유가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고백한다. 이는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직면하기 위해” 가장 간소한 삶의 방식을 살고자 하는 생태주의적 삶의 태도다. 더불어, 정부의 부당한 정책과 법에 항의하기 위해 숲을 선택한 소로의 사회비판적 행동이기도 하다. 허윤희의 <나뭇잎 일기>에 적은 세계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한 단상은 소로의 문명 비판적 사유의 허윤희식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예컨대 방사능 비와 인간의 욕망 때문에 희생되는 다른 생명들(2011.04.07), 원전 개발(2011.03.26), 시리아에 미사일을 쏜 미국을 보며 끊임없는 세계의 전쟁에 대한 우려(2017.04.10), 환경파괴로 점차 들리지 않는 새소리(2008.08.03)에 대한 염려와 비탄이 그것이다. 시대의 우울한 풍경을 압도할 만큼 아름다운 나뭇잎들의 다채로운 모습과 생기로움을 담은 나뭇잎 일기를 통해 허윤희는 자신만의 ‘월든’을 개방한다.

본래 회화 장르의 예술가로서 허윤희는, 자기 고백적 서사의 그림들에서 녹색 자연에 대한 사랑과 환경 위기 문제를 알리는 퍼포먼스 그리고 일기 쓰기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회화 매체의 실험과 확장을 꾀해 왔다. 이러한 예술적 실천들은 허윤희의 그림이 단지 화이트 큐브에 갇힌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한다. 그의 이러한 예술 행위는 나무 심기와 강연마저도 예술 행위로 치환한 사회적 조각가 요셉 보이스식의 ‘삶의 예술’과 같은 것으로도 여겨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허윤희의 그리기와 텍스트로 이루어진 ‘일기 예술’을 사계절의 시간을 의식하며 전개하는 ‘삶의 예술’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023년 10월 제주에서 시작한 <해돋이 일기> 시리즈 역시 삶과 예술이 구분되지 않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날마다 같은 자리에서 해를 바라보며 매일 새로운 ‘해돋이’를 그 현장에서 바로 그려내는 방식이다. 반복되지만, 반복 불가능한 해돋이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매일의 단상을 적는다. 그 한 예로 작가는 캔버스와 일출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다.

“매일매일 새로운 하늘, 새로운 그림을 한 장씩 그린다. 그림도 변화가 없는 듯해도 성큼성큼 변하고 있을까? 사생을 하면서도 나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일출을 그리며 나는 사라지는데 나다운 것은 남아있을까? 나다운 건 무얼까? 나는 도대체 뭘 그리고 싶은 걸까?”(#109. 2024년 4월8일)

빈 캔버스 앞에서 늘 다시 시작하는 화가의 모습으로, 작가는 자신에게 ‘나다운’ 예술의 본질을 묻는다. 유한한 인간의 삶과 변화무쌍한 자연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실존적 고민이 뒤섞여 있는 허윤희의 해돋이 일기는 ‘화가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 삶의 예술인 것만은 분명하다.

자연에 조응하는 신체 드로잉

자연으로 자연을 그리는 허윤희의 그림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자연과 인간, 식물과 동물의 신체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생장하며 뻗어나가는 리좀적 분화들이다. 마치 엎드린 사람의 발 모양의 산 (<부서진 발>, 2012),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깃털을 펄럭이는 거대한 새(<새-경계를 넘어>, 2017), 인체의 힘줄(혹은 뼈)로 대지를 누르듯 서 있는 나무(<나무>, 2013), 거대한 손으로 얼굴을 감싼 나무(<별이 빛나는 밤>, 2007) 등, 그의 그림에서 자연의 이미지는 사람의 손, 얼굴, 발, 힘줄, 핏줄과 같은 기관으로 보이기도 하고, 대지와 동물에서도 식물의 이미지가 섞여 있기도 하다. 이처럼 허윤희의 그림에서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생명들이 연결되고 얽히며 서로 조응한다. 린 마굴리스가 언급했듯이, 자연은 공생하며 진화해 왔다. 선박과 제지산업에 필요한 목재 때문에 벌목된 벌거숭이 산에서, 흙과 곰팡이가 소나무와 버섯을 자라게 하고 그 버섯은 사람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며 서로의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연은 지혜롭게도 서로의 신체에 기대고 협력하며 공생의 사회를 이루어온 것이다.

숲의 선들이 구겨지고 주름져서 경계를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서로의 위아래로, 서로를 파고들며 접히고 어우러져’ 즉 공존하기 위한 연결의 ‘주름’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말은 옳게 느껴진다. 흥미롭게도 허윤희의 그림은 잉골드의 생각을 잘 예시해 준다. 허윤희가 그린 새가 사람의 얼굴이 되고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드로잉이 자연에 조응하는 선의 흐름을 지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리는 선의 자유로움은 도시의 딱딱하고 매끄럽고 각진 라인이 주는 강박적인 선과는 다르다. 유연하고 풍부하며 보이지 않는 움직임까지 감지하여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고, 다양한 사물들이 얽혀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허윤희의 일기에서 발췌한 레이첼 카슨의 『우리를 둘러싼 바다』 이야기를 들어보자.

“석회질로 이뤄진 우리의 단단한 골격 역시 칼슘이 풍부했던 캄브리아기 바다의 유산이다. 심지어 우리 몸의 세포를 이루는 원형질조차 태곳적 바다에서 최초의 단순한 생명체가 출현했을 때 모든 생물에 각인된 화학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생명 자체가 바다에서 시작된 만큼, 우리도 저마다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작은 바다에서 생을 시작한다.”

카슨의 말에 귀 기울이며 허윤희의 그림들을 다시 바라보면, 그의 모든 그림이 바다에서 시작된 모든 생명들의 얽힘과 연결을 의식하는 작업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필자에게는 허윤희의 그림이 오랜 시간 자연과 인간, 모든 생명의 연결을 숙고하면서 자연과 조응하는 삶을 살아온 자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 시대, ‘고정관념과 제도에 맞서 자유로운 삶에 대한 실험과 실천을 기록한’ 소로의 후예로서, 창조적인 삶을 꿈꾸는 화가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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