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프 틸레 교수의 허윤희의 예술 작업에 관한 소고

존재의 기호로서의 창조적 사라짐

 우리가 흔히 상상력이라고 말하는 마음의 창조력은 삶의 경험을 지닌 예술가들에게 고유한 것이다. 이들 중 아직도 삶의 경험을 갖지 못한 예술가는 적어도 마치 그것을 체험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흉내를 내거나 모방을 해야만 한다. 그도 그렇듯이 우리들 인간이 스스로 불행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난 이후부터, 그래서 자신의 불행을 사실로서 느낄 뿐 만 아니라 생각을 통해서도 확인하고 난 이후에는 오로지 어린이들이나 예술가들만이 매우 생산적이면서 생생히 살아있는 상상력을 통해 이러한 불행한 의식을 넘어서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의식은 세상 밖으로 밀쳐낼 수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특히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이 불행한 의식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우리가 매일 쉬는 영혼의 숨결은 불행하다는 의식의 무력감에 의해 중단되거나 저지되어서는 안 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서 우리는 어떤 주체의 단지 우울하고 저조하기만 한 마음상태와 어떤 예술가가 지닌 감각기관, 다시 말해 단순한 심리적 부정성과 예술적 부정성을 엄연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예술적 부정성의 원천인 상상력은 부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현대예술에 남아있는 단 하나의 미적 가능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지적할 수 있는 점은, 허윤희 작업의 대상이 비록 멜랑꼴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고통스러운 상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태를 반성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묘, 채색화, 일기장 스케치, 벽에 그린 대형 목탄화, 그리고 그녀가 쓴 시에서도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녀의 그림과 시의 행간에서는 동경의 모티브를 읽을 수 있고 또 불행한 의식의 고통이 미적 파토스로 변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예술적 변환이야말로 그녀가 그림과 글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호와 상징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멜랑꼴리는 이를테면 무대가 되면서 이 무대 위에서 미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연구 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행해진 예술작업에서 허윤희는 독일 브레멘시의 오스트홀츠-테네바 구역에 위치한 저소득층 고층아파트 층마다의 계단 올라가는 벽에 주민들이 오가면서 마구 그려놓은 낙서사이에 남이 거의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자신의 그림을 섞어놓고 있는데, 남의 낙서에 자신의 그림을 섞어놓은 이러한 종류의 예술작업은 사회적 삶에 끼어 드는 개입의 형식으로서 공적 공간에서 행해지는 예술의 매우 성공적인 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허윤희는 남서부 프랑스 가스코뉴 지방의 오뜨 피레네에 위치한 ‘아카데미 갈랑’의 부지에서 “라오스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연구 미술프로젝트에서도 두 해 여름에 걸쳐 두 편의 작품을 설치하였다. 첫 번째 작업에서 그녀는 우선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으면 자신의 몸이 겨우 들어갈 만한 둥근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는 강가에서 주워온 주먹만하거나 머리통 만한 둥근 돌로 지름이 150㎝되는 구덩이 테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구덩이 안쪽을 향해 테두리 전체에 빙 둘러 월계수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그 나무가 그 사이 2배 정도나 자라 시야를 가림에 따라 정작 이 작품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몸을 숨길 수 있는 구덩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사라짐을 통한 그녀의 미학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두 번 째 작업에서 그녀는 강가에서 모은 자갈로 단 높이의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나무로 된 오두막을 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아시아적 특징과 정취를 지닌 조그마한 통나무집이었다. 이 집의 지붕은 평평하고 무거운 자갈로 뒤덮여 있다. 이번에도 이 집의 크기는 그녀의 몸에 맞게 그녀가 몸을 펴고 누우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허윤희 스스로는 이 집을 ‘관(棺)의 집’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 오두막집 바깥 주위를 빙 둘러서는 여섯 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다. 이 오두막은 누운 사람의 머리가 동쪽을 향하게끔 방위를 잡고 있고, 몸과 머리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동양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해뜨는 쪽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먼 고향 땅 한국 쪽을 못내 그리워하면서 바라보는 슬픔과 우수에 찬 시선이기도 하다.

 어떤 매체를 사용하든지 간에 허윤희의 작업에서는 방금 전까지도 존재하는 것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에 대한 체험이 항상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라짐에 대한 체험은 우리의 이식을 필연적으로 반성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허윤희의 작업에서는 우리가 그 때마다 체험하는 현재라는 것이 그대로 존속할 수 없다는 인식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상실의 이와 같은 다양하면서도 미묘한 모습을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목탄소묘를 통해 큰 규모의 벽화를 만들어내는 허윤희의 퍼포먼스적 예술작업이다. 그녀는 먼저 많은 시각과 정성을 들여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는 곧이어 앞에서 기울였던 것에 조금도 못지 않은 에너지와 열정을 가지고 그 벽화 위에 다시 벽 색깔로 덧칠을 함으로써 이미 그렸던 벽화를 지우는 식의 퍼포먼스적 예술작업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작업에서는 벽의 바닥에 떨어진 목탄의 가루만이 벽화작업과정의 가시적 흔적으로 일정기간 남게 된다. 흔적 -바로 이 흔적이 존재하게 되면서 이러한 예술작업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또 이러한 흔적이야말로 해체하는 식의 예술작업이 꼭 지녀야 할 필요 불가결한 요건이다. 이와 같은 퍼포먼스적 행위는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내포되어 있거나 그 속으로 들어간다. 단순히 지식을 소개하거나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문제가 되는 어떤 사고과정에서는 기호가, 기호가 지칭하는 대상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다시 말하면 어떤 미적 사건은, 비록 기호가 지칭하는 대상이 이미 사라져 버린 후에도 계속 기호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원칙적으로는 예술 없이도 작품이 존재할 수 있고 또 작품 없이도 예술은 존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퍼포먼스적 예술작업에서는 언뜻 보아 의미 없어 보이는 지우기 행위로 인해 안개와 같은 여러 인상들이 남게 되고 또 그 인상들 속에서 허무의 느낌이 고개를 든다. 처음에 개대했던 것에 대한 잠정적인 생각이나 느낌은 방금 그렸던 대상이 지워지면서 존재의 결핍으로 다가서고 엄청난 놀라움과 충격을 받게 되면서 한 층 더 강렬하게 된다. 비디오 필름 속에서든 실제 행위를 통해서든 어떤 예술작품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될 때 느끼는 감정은 우리들 마음속에 꿈이나 아니면 무엇이라고 말하기 힘든 생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때의 감정은 어떤 기쁨의 감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의 감정은 붙들어 둘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방금 만들어진 그림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아쉬움뿐만이 아니라 영혼 깊숙한 곳에서는 어떤 커다란 갈망이 남게 된다. 바로 이러한 갈망이야말로 우리들에게는 더 높은 기쁨인데, 왜냐하면 고정되고 제한된 일체의 것은 우리가 붙잡을 수 (따라서 이해할 수도) 없는 그 어떤 것만큼은 우리들에게 만족감을 주기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사라지는 어떤 현재의 구성적 요소들이 집중되고 있다. 한마디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그림의 소묘는 지속적으로 고정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우리는 행위의 순간에, 이미 보았던 대상의 기억하는 표상에 매달리게 된다. 영혼의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붙잡을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것이 갖는 잠재력은 엄청나게 커서, 그것은 구성적으로 완전히 충족되지 않으며 기쁨의 상황으로서 다시 해체된다. 그러니까 해체와 예술적 인지활동은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또한 모든 종류의 현재적 인지활동이 지닌 법칙이기도 하고 지나간 것의 사라져버린 상태에 대한 법칙이기도 하다. 미적 사건의 수용에서 우리는 언제나 지나간 것을 마주 대하고 있는데, 이 지나간 것은 목전의 ‘현재’앞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낼뿐만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것을 표상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사라짐에 대한 이러한 반성적 사고는 인간적 삶의 일반적 시간이 그 끝을 향해 서서히 나아간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시간성과 존재의 점차적 사라짐에 대한 반성적 사고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반성적 사고는 방금 전에 보았던 그림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를테면 시각적 침묵에 의해 겨우 가려지게 될 따름이다. 공들여 만들어 낸 성공적 작업에 대한 기쁨은 미끄러지듯 사라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 기쁨은 그때마다의 아름답고 긍정적인 현재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갖는 극적인 사건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 지닌 미묘한 양상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겪는 무(無)에 대한 실존적 경험의 양상인데, 그러한 무에 대한 실존적 경험은 인지 과정이 끝나기도 전에 급작스러운 종말로서 우리 앞에 다가서고 또 삶 속에서의 죽음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난다. 계속 이어지는 예술작품(우리의 삶도)은 바로 이러한 상징 속에 있게 된다. 이것은 연속적인 시간의 계기 속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 발자국이 아니라 시간성 그 자체로부터의 도약, 즉 존재의 시간으로부터 무(無)에로의 도약이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삶의 끝을 장식한다는 본질적 통찰을 관조적으로 지시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삶의 특징과 인간실존의 특징, 그러니까 그때마다의 현재는 해체되면서 살아있는 시간이 되는 것을 중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이 물 흐르듯 사라짐에 따라 이해 불가능이라는 어쩔 수 없는 파국적 상황이 슬그머니 자리잡게 된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한 이러한 감각적 효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나타나는 것은 독특한 그림 그리는 방식을 통한 그림 그리기에 대한 허윤희의 눈에 띄일 정도의 가시적 기쁨이다. 이를 통해 예술적 부정성은 구제된 삶의 기쁨이라는 형식으로 전환되고 그럼으로써 부정적 현재 순간과는 반대되는 예술적 공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영원한 회귀의 리듬과 영원한 무한성의 리듬 속에서, 하나의 질에서 또 다른 하나의 질로 나아가는 전환이자 언제나 동일하면서도 매번 다른 것이 되는 것이 되는 과정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일기장에 스케치를 하는 식의 그림을 보면 우리는 허윤희가 예술을 삶에 겨냥해서 하고, 삶을 예술에 겨냥해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러한 그림 속에서 매일의 일상이 어떠했으며 삶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스스로에 질문을 던지듯 스케치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녀는 엄청날 정도로 조직화된 실존 속에서 삶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또 그녀의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표현은 이러한 실존을 위한 예술적 몸부림의 기호이다. 예술작업을 통해 이처럼 삶을 진하게 표현하고 집중적으로 살아가는 일에 매달린다는 것은 짐작하건데 대단히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허윤희가 이러한 힘든 일이 아니라 예술적 부정성으로부터 삶의 긍정성을 뽑아내는 어떤 힘에 더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와 함께 화해하면서 충분한 근거를 지닌 마음의 위로를 이끌어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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