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 바당 》

수애뇨339, 2024년 5월 17일 – 6월 12일

태양을 만나는 아침 _ 허윤희

제주로 떠났다. 서울에서의 18년간의 대학 강사직을 접었다. 그림이 팔리지 않으니 생계를 위해 강의를 했고, 강의를 하느라 작업할 시간이 부족하니 예술가로서 늘 아쉬움이 컸다.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도 좋은 작품이 나올까 말까 할 텐데, 이런 상태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도시에서의 삶에 지쳐 나는 우울하고 무기력해졌다. 번 아웃이 왔다.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티기 힘들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제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자연 속에서 쉬면서 기운을 차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소박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른 새벽 바닷가로 나갔다. 새벽 바다 위로 아침놀이 아름답게 물들고 태양이 떠올랐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보며 ‘우주 속에 내가 살아있구나!’, 내가 이 땅 위에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꼈다. 마음속에도 햇살이 반짝 빛났다. 날마다 일출을 보러 바닷가로 나갔다. 우주는 내 눈앞에서 장엄한 탄생의 순간을 보여 주었다. 알을 깨고 새가 나오듯 햇살이 사방으로 비치고 우주가 태양을 낳았다. 그 빛과 색채의 향연은 황홀하여서 넋이 나갈 정도였다. 그렇게 아침이 열렸다. 그동안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다. 아침마다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핸드폰으로 일출 사진을 찍다가 문득 그림을 그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으로 그려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자연의 생명력을 전해주고 싶었다. 화가로서 거부할 수 없었다. 2023년 10월 16일 날마다 해돋이를 그리는 <여는 바당> 작업을 시작했다.

날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재료로 그리기로 정했다. 해돋이 그림을 의식처럼 꾸준히 반복하리라 마음먹었다. 그것은 간절함이고, 수행이고, 하나의 기도이다. 날마다 정성을 다할 때 예술은 진짜가 되고,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

저녁에 일찍 자고 일출시간 1시간 전에 일어났다. 새벽에 일어나는 일은 힘이 들었다. 조금만 더 자고 싶다, 그냥 자버릴까…. 새벽마다 마음이 흔들리지만, 날마다 해돋이를 그리겠다고 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벌떡 일어난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그림을 한 장씩 완성해서 돌아오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어려운 일이지만 좋아하는 일이기에 계속할 수 있고, 어려운 일이기에 해냈을 때 성취감은 더 크다.

겨울이 다가왔고, 추웠다. 제주의 바람은 세고 거칠게 불었다. 강풍에 이젤이 넘어지고 캔버스가 날아갔다. 바람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바람과의 사투 속에서 정신은 더욱 맑게 깨어났다. 바람에 텐트가 흔들릴 때 붓질은 더욱 힘찼다. 바람이 고요해지는 순간을 기다려 한 획 한 획 선을 그었다. 그렇게 하루에 한 점씩 그림을 그려나갔다.

나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 그림을 수정하지 않는다. 조금 아쉬움이 남을 때도 있지만 그 순간의 생생함이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새벽 공기의 신선함, 빛나는 아침 햇살, 바닷바람의 내음, 파도 소리가 들어 있고, 붓질마다 그 순간의 망설임과 결단이 들어있다. 날 것의 생명력이 좋다. 자연이 그런 것처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하늘과 바다를 그리는데 날마다 달랐다. 내일의 하늘을 예상할 수가 없다. 태양이 나타날지, 어떤 모습으로, 어떤 빛깔로 나타날지, 구름은 어떤 모습으로 움직일지 알 수가 없다. 겨울의 태양과 봄의 태양은 느낌이 달랐다. 바다도 태양빛에 따라 다른 빛깔로 물들었다. 겨울 바다는 검푸르고, 봄 바다는 유채꽃처럼 노란빛이었다. 여름의 태양은 얼마나 강렬한 모습을 보여줄까? 그래서 그림 그리러 가는 날마다가 설렜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을 나는 사랑한다. 내일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품게 된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폭설이 내리는 날은 그림을 그리러 가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반드시 빛나는 태양이 떴다. 새벽 운무로 온통 회색뿐인 하늘도 그림을 그리면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태양이 빛나는 날 못지않았다. 그래서 흐리고 어두운 날도 더 이상 불평하지 않는다. 모든 날들은 날마다의 아름다움이 있고, 서로 연결돼 있고, 다채로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삶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가 다 새로운 날이고 소중하다. 비가 오면 그림도 쉬어 가고, 마음 놓고 늦잠을 잘 수 있어서 좋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이마를 스칠 때, 나는 붓을 들고 캔버스를 통과해 먼 우주로 여행을 간다. 깊은 고요 속에서 빛나는 태양이 되고 자유로운 구름이 되고 반짝이는 물결이 된다. 내가 사라지고 영혼이 맑아지는 시간, 행복한 화가의 시간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자리, 새벽 바다 앞에 서면 ‘여기, 내 자리에 왔구나!’ 하는 기쁨이 차오른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