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억 – 사라지는 시간 – 생태주의
이영욱(미술평론가)
1. 작가 허윤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일련의 목탄 드로잉 작업이다. 그녀는 작가 이력 초기부터 지금까지 20여 년간 목탄 드로잉 작업을 지속해 왔으며, 또한 이 드로잉을 일시적 벽화, 퍼포먼스, 비디오 작업으로 확장하는 다양한 변주를 보여왔다. 물론 근자에 들어서는 매일 나뭇잎 하나를 주워 그림으로 그리고 글을 덧붙인 <나뭇잎 일기> 같은 일기 형식의 작업을 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아크릴 물감과 유화를 활용한 ‘멸종 식물’ 그리기 작업에 몰입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작업 역시 배면으로는 목탄 드로잉 작업과 연계가 뚜렷하다. 여러모로 허윤희 작업의 요체는 목탄 드로잉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2. 첫눈에 허윤희의 목탄 드로잉은 친근하게 느껴진다. 거기서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는 형상들을 만난다. 산, 들, 새, 물, 별, 나무, 빙하, 땅, 풀, 꽃, 바람, 배추 같은 자연물, 집, 배, 건물, 도시 등의 인공물, 그리고 익명의 혹은 가상의 인물, 얼굴, 손과 발 등 몸 혹은 몸의 일부가 그것이다. 개별 작업은 이들 형상 중 하나 혹은 몇몇을 포함하고 있다. 그녀의 드로잉은 이런 도상의 기호 층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진행된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가 생겨난다. 시적으로 응축된 이야기, 그러나 시각적 요소들로 전개된 이 이야기는 대부분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긴 어렵지만, 일정 정도 짐작이 가능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이 이미지들이 행사하는 시각적 충격은 확연하다. 깊은 갈망을 드러내거나, 사건, 기억과 연결된 정황을 떠올리거나, 위로와 축복의 행위를 상기시키거나, 파멸적 상황과 대면케 하거나, 혹은 은은하게 빛나는 순간들이 화면에 펼쳐진다. 그것들은 강력한 설득력과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허윤희의 드로잉과 우리가 본격적으로 마주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3. 일단 확인해야 할 것은 허윤희 특유의 감성과 상상력이다. 이 감성과 상상력은 그녀가 인간과 온갖 사물, 자연을 대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그녀의 드로잉에서 신체, 사물, 생명 그리고 그들의 뒤섞임과 표출은 언제나 상호삼투하고 전환하는 움직임 속에 있다. 집에서 뿌리가 돋아나고, 내뱉은 말은 꽃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며, 부는 바람에 위를 향한 머리카락들은 나무숲으로 변신한다. 상처 난 발이 넝쿨 속 대지를 파고드는가 하면, 배추는 산과 호수를 제 안에 품고, 도시는 배에 실려 항해를 시작한다. 이는 나무와 집, 도시, 호수, 산, 바람을 자기 몸과 분리된 것으로 느끼지 않기에 가능한 상상력이요, 감성이다. 이성복이 <남해 금산> 첫 대목에서 “한 여자가 돌 속에 묻혀있었네/그 여자 사랑해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라고 쓴 것을 보고, 황현산은 “시인이 정말로 돌 속에 묻혀있는 여자를 보고 있으며 자신이 돌 속에 진정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한다”고 풀이했다. 허윤희가 느끼고 상상하는 것, 역시 이런 식이다. 그녀의 감성과 상상력은 몸에 맞닿아있다. 여기서 펼쳐지는 것은 일종의 상호-신체성의 세계다.
4. 신체는 의식 주체의 통제 너머에 살아있다. 장기와 세포는 마치 물이 증기가 되어 비로 내리듯 우리의 의식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또한 신체 기관과 그 작동의 일정 층위는 의식의 매개 없이 바깥 세계와 교접한다. 피부는 공기를 호흡하고, 손과 발은 무심하게 사물과 접촉하며, 땅 위를 걷고, 움직인다. 이 무의지적인 행위는 수없이 반복되며, 그 반복 과정에서 체험된 감각, 정서와 함께 몸에 축적되고, 자연스레 몸의 무의식 혹은 몸의 기억을 이룬다. 이 신체의 기억에 대응하는 세계 역시 또 하나의 신체다. 인간은 자신에게 귀속된 몸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인 거대한 신체와 소통한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개별 신체는, 사물이든 생명이든 또 어떤 자연이든 모두 포괄하는 이 세계라는 신체에서 태어나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간다.
5. 작가는 어떤 예술적 모티브를 감지하고 작업을 진행할 때, 종종 모종의 내적 체험에 이른다. 자기 안에서 결코 자기 주체에 국한될 수 없는 낯선 효과를 느낀다는 것이다. 여기서 낯선 효과 또한 상호-신체성에 닿아 있다. 그것은 주체가 자기이자 타자인 제 몸의 내부에서 자기의 몸을 다른 몸을 향해 여는 것을 의미한다. 곧 자기 몸에 새겨진 다른 신체, 곧 세계와 소통하고 교섭했던 기억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런 내적 체험과 맞닥뜨릴 때 작가들은 적지 아니 당황하곤 한다. 그들은 자기 안의 이 낯섦을 두려워하거나, 혼란스러워한다. 자신의 타자성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솔직하고 정직한 작가는 이 낯선 효과를 향해 용감하게 전진한다. 그는 이미 친근해졌거나 상투화된 언어로 이 낯섦을 조절하거나 우회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낯섦의 객체성, 몸의 기억을 좇아 거리낌 없는 솔직함과 자유로운 표현을 향해 분투한다. 그리고 이렇듯 또 다른 몸=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몸은 이미 알았으나 주체 자신은 알지 못했던 관계를 통과해 어떤 식으로든 주체가 표현되면, 주체는 이미 다른 주체가 된다. 허윤희의 드로잉에선 이 근원적인 낯섦과 대면하여 절실함으로 그것을 관통해낸 경과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한 작가가 산출해낸, 자신에서 나온 이미지이면서 자신을 넘어선 낯선 이미지 앞에 선다. 사물과 생명과 인간과 자연이 뒤얽혀 침묵으로 외치고, 위로하고, 갈망하는 낯선 이미지와 마주쳐 그것과 공명한다.
6. 목탄은 이러한 상호-신체성의 세계를 표현해내는 데 적실하다. 목탄은 그 어느 매재媒材 보다 신체-친화親和적이다. 허윤희의 드로잉은 이 같은 목탄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다. 점성을 지닌 물감을 사용하는 붓이나 광물질의 단단한 심을 박아 넣은 연필과 달리 목탄은 그 자체 자연의 나무를 태워 만든 숯이다. 목탄과 신체 사이에는 인공적으로 조율된 매개물, 도구가 없다. 목탄과 신체(손)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손은 목탄을 쥐고 그냥 그대로 그려 나간다. 손이나 신체가 하중을 가하면 목탄은 상응해서 자기 몸을 부스러뜨린다. 부서져 가루가 된 목탄은 점과 선으로 흔적을 남긴다. 허윤희는 서로 다른 속도와 하중으로 그때마다 상이한 정서의 흐름을 담아 선을 그리고, 드로잉을 해간다. 색채를 빼놓는다면, 목탄 입자가 부서져 이뤄내는 표현 가능성은 그 어느 매재보다 폭넓고, 다양하고, 풍요롭다. 이 표현 가능성에 근거해서 허윤희는 자기 몸에 축적된 기억, 또 다른 몸과의 소통, 교섭을 통해 몸에 잠겼던 기억을 싣고, 길어 올린다. 그리하여 그녀의 선은 한편 호방한가 하면 달리 예민하고 날카로우며, 한편 격렬한가 하면 부드러우며, 은은하고 미묘한가 하면 어둠과 밝음의 대비가 강력하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각을 파고든다. 게다가 목탄은 이미 그어진 선을 손이나 기타 소재를 사용해 비비거나 문지르면, 지워지거나 부드러운 흔적을 남긴다. 이 지우기나 문지르기는 기술적으로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할 때 유용하다. 하지만 이 비비기, 문지르기 역시 화면에 몸의 기억을 새겨넣는데 요긴하다. 그 남겨진 흔적들은 피부에 스친 듯 민감한 질감을 가질 뿐 아니라, 층을 이루고 겹침을 통해 다채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목탄이 손에 국한되지 않는 몸의 스케일 전체에 반응한다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그녀는 이 스케일에 상응하여 손보다는 몸 전체에 반응하는 선, 정적이고 묘사하는 선이 아닌 역동적이고 행위 하는 선을 구사한다. 그녀의 화면이 전체로 항상 움직이는 것, 그리고 이런 움직임이 종이 면에 국한되지 않고 벽으로까지, 행위와 퍼포먼스로까지 확장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다.
7. 짧지 않은 독일 유학 시기 동안(1995~2004) 허윤희가 했던 작업 대부분은 목탄 드로잉이다. 이들 작업은 마치 일기를 쓰듯 혹은 고백하듯 자전적으로 작가가 처해있던 상황 그로부터 생겨나는 갈망, 곧 내적 체험의 세계를 드러낸다. 하지만 개인의 고통과 열망의 표현으로 자기 치유를 시도하는 이들 작업은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의 몸짓이 지닌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목마름>(1997)은 유학 초기 그녀가 그린 연작 드로잉이다. 작업에선 마치 땅속에 묻힌 듯 혹은 자궁 속에 들어앉은 듯 웅크리거나 누운 인물의 모습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일종의 가사假死 혹은 퇴행 상태에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목마름에 물을 갈망하는 자세기도 하다. 이러한 작업이 생겨난 배경에 이민(유학) 생활이 초래한 어려움이 있는지, 개인적인 심리적 상처가 관련되었는지, 혹은 또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하는지는 일단 접어두어야 할 것이다. 허윤희는 이 시기 목마름을 주제로 작업을 했고,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사건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거칠고 강한 목탄의 선과 그 선들을 문질러 드러난 어둠의 지층, 그 속에서 가냘픈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는 절망적 상황이 우리의 감성을 찌른다. 이 시기 그녀의 드로잉은 ‘어두운’ 드로잉이다.
1999년과 2001년 여름 허윤희는 남서부 프랑스 가스코뉴 지방의 오뜨 피레네에 위치한 ‘아카데미 갈랑’의 부지에서 “라오스 마을”이라는 이름의 자연미학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99년에 그녀가 한 프로젝트는 <둥근 정원>이다. 이 작업에서 그녀는 우선 땅바닥에 자기 몸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둥근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 옆으로 강가에서 주워온 주먹만 하거나 머리통만 한 둥근 돌을 둘러 지름 150cm 정도의 테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테두리 약간 안쪽으로 빙 둘러 월계수를 심었다. 나무는 곧 자라 밖에선 구덩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2001년의 <관棺집>은 몸이 들어갈 만한 직사각형의 땅 위에 강가에서 모은 자갈로 한 단 높이의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오두막을 지었다. 세워진 오두막 지붕 위에는 다시 자갈이 놓이고… 허윤희는 이 집을 ‘관집’이라 불렀는데, 말 그대로 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 시기 그녀의 작업은 자기 존립의 원초적인 위기를 감지한 한 사람, 생명의 마지막 불꽃에 도달한 한 인간의 방어기제를 보여주는 듯하다. 불가피한 고립 속에서 가까스로 희미하지만 절실한 갈망을 이어가는 자의 생명의 순환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그것이다.
8. 2000년 어간부터는 상대적으로 ‘밝은’ 드로잉이 시작된다. 이제 화면의 반 이상을 뒤덮던 땅속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층은 물러나고, 그 안에 자리 잡았던 도상들은 밖으로 나온다. 이 시기에 자주 등장하는 도상은 (특히 얼굴을 위에 실은) 작은 ‘배’다. <여행>(2002)이라는 제목의 연작도 있고, <항해>(2001), <떠남>(2002)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모티브가 개인사와 연관되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 그녀가 조각배를 타고 떠나려 하거나 ‘여행’과 ‘항해’를 상상하는 것에서, 최소한 그 이전의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해석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초점은 역시 이들 드로잉이 드러내는 호소력에 있다. 벽에 이어 붙인 종이 바탕에 그린 <항해>에서는 한 헤엄치는 인물의 얼굴과 몸이 부각 된다. 얼굴을 정면으로 향한 그 인물의 표정은 지친 듯 평화롭다. 헤엄치며 뿜어져 나온 물방울과 포말은 헤엄치는 물의 파문으로 되돌아가고, 가는 선들이 겹쳐 망을 이루는 물의 흐름은 헤엄치는 인물의 몸을 부드러운 리듬으로 감싼다. 이로써 이 드로잉은 어린 시절 우리가 헤엄치던 몸의 기억과 고통 속에 절망적 상황을 헤쳐나오던 몸의 기억과 지금 다시 ‘항해’를 도모하고 나아가려는 자의 몸의 기억이 한 데로 합쳐 일렁이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떠남>은 벽 위에 목탄으로 그림 드로잉이다. 눈앞 정면의 조각배는 저 멀리 수평선을 향하고 있다. 배 위에는 수많은 손이 가득 차 있고, 저마다 자신의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나뭇잎 같기도 하고 날개 같기도 하고, 손 같기도 한, 예상치 못하게 무의식에서 끌어나온 듯한 이 형상들의 합창은 그 자체 강력한 결별과 아우성, 출발과 비상을 전하는 듯싶다.
이 무렵 허윤희는 벽화작업을 시작한다. 이후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벽화작업의 시초다. 목탄을 활용해 몸의 기억을 펼치는 그녀의 드로잉이 몸의 스케일과 행위궤적에 상응하는 벽화로 이전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벽화가 일시적 벽화라는 점, 곧 멀지 않아 지워져 버린다는 점은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준다. 같은 시기에 그녀가 일상 사물의 드로잉(의자, 샹들리에, 잎이 무성한 관목, 꽃)을 글(시)과 하나로 묶은 <Dairy Drawing>(2003) 작업을 시작한다는 점도 주목을 요한다. 원래 자전적이고 고백적 성격을 잠재하고 있는 그녀의 작업이 좀 더 분명하게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 형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양자 모두에서 우리는 예술 행위와 그 시간성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9. 귀국(2004년)을 앞둔 2003년 허윤희는 <밝은 드로잉> 연작을 한다. 이 연작이 ‘밝은’ 드로잉인 까닭은 바탕은 비워둔 채, 단지 형상만 활용해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어있는 공간은 밝다. 예를 들면 나무를 그리고, 사람을 그리고, 집을 그리지만, 바탕은 최소한도로 암시되거나 그대로 있다. 이 드로잉에서 형상은 대부분 연속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한군데로 겹치거나 뭉쳐 나타난다. 귀국 후에도 역시 같은 방법을 활용한 드로잉이 계속된다. <꽃다발>(2007)의 경우엔 조그만 집이 있고, 그 집의 문밖으로 꽃다발이 터져 나오며, 손 하나가 천을 들고 그 집을 닦고 있다. 도상의 기호 층위가 부각 된 기호 조합 같은 이 구성, 따라서 도상들 사이마다 일종의 비약을 내포한 이 조형은, 하지만 허윤희의 작업에선 별 무리 없이 하나의 시적인 이미지-서사로 성립한다. 감각(신체) 층위에서 작동하는 시각적 디테일의 설득력이 각 도상과 그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성은 또한 이들 작업을 역동적인 움직임이 표출되고, 형상의 상호 변환이 펼쳐지는 화면으로 이끈다. <두 얼굴>(2005)에선 한 인물의 머리에서 자라난 나무줄기들에서 잎의 움직임이 드러나고, 그것이 또 다른 얼굴로 변환한다. <새가 되어>(2008)는 새가 날아가는 연속 장면과 인물의 두상이 겹쳐, 한 인물이 새로 변신하고, 새는 또한 인물이 되어, 공중 위로 날아오르는 움직임이 연출된다. 그녀의 상호-신체적 언어는 이 시기 역동적 움직임을 낳고, 비약과 축약의 리듬을 드러내며 변신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정적이고 암울한 상황 속 미약한 생명을 그려냈던 그녀의 드로잉이 이제 역동적인 상상을 펼쳐내는 드로잉으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작업은 기본적으로 회상과 성찰의 시점에서 이루어진다. 과거 사건을 회상하고 기억하면서, 뒤늦은 자각이 생겨나고, 미래를 향해 새로이 열망하고 축원하는 가운데, 내적 변화의 격동이 드러나는 것이다.
10. 2006년 허윤희는 소마미술관의 커다란 벽면에 안쪽에 호수처럼 물이 고인 커다란 배추 하나를 그리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오랜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긴 비행의 여독을 풀고 혼자 동네 시장 구경을 간 날, 오전의 햇살이 가볍게 빛나고, 채소가게에는 배추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흙 묻은 배추 다발에서 앞에서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항상 먼 곳을 동경하고 멀리 떠나려고만 했던 나. 그래서 늘 물을 그렸고, 그 물은 밖에서만 출렁거렸다. 이제 그 물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이 시점부터 허윤희 작업이 저변에서부터 또 다른 전환을 시작하는 듯싶다.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것은 일단 작가 개인의 변모다. 그녀는, 자신이 이전까지 외부 먼 곳에서 어떤 이상적인 꿈을 찾으려 했다면, 이제 자기 안에서 그 꿈으로 다가가는 실마리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배추는 그 구체적 상징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내면을 응시하던 영혼은 이제 고개를 들어 일상의 현실을 바라보고 자신을 이 현실의 거주자로서 자리매김한다. 작업 또한 결을 달리하는 여러 모습을 선보인다. 2012년 갤러리 소소에서 열린 개인전 <배추, 발, 후쿠시마>는 이전과는 완연히 달라진 작업을 제시한다. 이들 작업은 일인칭 화자의 시점이 우세했던 이전 작업과 달리 3인칭 화자의 시점을 포괄하고, 지향한다. 2011년 동일본 후쿠시마 재앙을 소재로 한 두 개의 대작 <그날 밤 별이 유난히 빛났다>(2012)와 <부서진 발>(2012)는 이 전시의 초점이다. 재앙은 목탄이 구사하는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재연再演된다. 유한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낳은 재앙. 별은 유난히 빛나지만, 이곳에는 인간의 그 어떤 기대도 자리할 구석이 없다. 드넓은 우주 안에 떠 있는 듯 크고 작은 별들의 흐름과 배치, 부서진 발로 은유된 자연, 그리고 그 아래 막막한 어둠 속 파국에 처한 마을 풍경은, 우리의 소소한 일상마저 이렇듯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있음을 웅변한다.
허윤희는 이 시기 그녀가 녹색 사상을 접하고, 깊이 감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잡지 『녹색 평론』에 표지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2008~), 그곳 공부 모임에 참여해 다양한 활동을 같이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제 인간 개개인 내면의 사랑과 갈망, 고통과 연민이, 영원하지 않은 삶, 사회적으로 제약된 현실을 사는 이곳 사람들의 희망, 절망과 잇닿아 있음을 확인하는 듯하다.
11. <나뭇잎 일기> 연작을 시작한 것(2008~)도 이즈음이다. <나뭇잎 일기>는 그녀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의미 있는 책’이라고 칭한 <월든Walden>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구상에 주목해 시작한 프로젝트다. 생태주의 사유의 선구자인 소로는 한 글에서 나무와 풀의 잎을 채집해 윤곽을 그리고 물감으로 그려내 한 권의 책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품었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내용을 접한 허윤희는 그 구상을 자신이 실현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나뭇잎 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 작업이 일기 형식으로 진행된 것은, 그녀 자신의 선택이다. 그녀는 거의 매일 산책을 하고, 그때마다 나뭇잎을 하나씩 주워 그것을 그리고, 그날마다 있었던 일, 단상, 시 혹은 글귀를 그림 아래쪽에 적어 넣었다. 나뭇잎 그림은 매우 정교하며, 무엇보다 잎 하나하나의 개성이 두드러진다. 글은 대부분 단상이고, 그날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잔잔한 소회가 드러난다. 매일매일의 시간 흐름을 의식하며 자기성찰을 수반하는 일기의 특성 위로 나뭇잎 그림이 감각의 닻이 되어 ‘자기 대화’의 결을 두텁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뭇잎 일기>의 요체는 나뭇잎 하나하나가 지닌 생명의 기억을 하루하루 일상에 새겨넣는 행위에 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허윤희 특유의 감성과 상상력이 생태주의 사유 지평과 이어지는 흐름이다. 생태주의는 “자연을 인간 주위에 존재하는 것, 즉 인간이 중심이 되고 자연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환경 개념과 달리 “인간을 자연의 수많은 생물, 무생물과 함께 어울려 존재하는 한 부분”으로 여긴다. 여기에서 인간은 이 세계의 다른 모든 사물, 생명과 평등하다. 이미 확인했듯 허윤희의 작업은 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의 상호-신체적 소통과 교섭 혹은 몸의 기억에 바탕을 둔다. 곧 그것은 자기 안에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기 밖 타자와의 공존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녀의 이 같은 작업이 생태주의 사유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나뭇잎 일기>는 무의식적인 몸의 기억을 의식적인 생태주의 사유를 통해 확인하고 확장하는 과정, 곧 일종의 훈련 혹은 배움의 과정을 기록하는 행위로 읽힐 수 있다. 그것도 마치 이 행위가 미지의 혹은 눈앞의 관객에게 일종의 감각적 개념적인 퍼포먼스를 펼쳐 보이듯 말이다.
나뭇잎 하나하나의 생명과 그 기억을 하루하루 일상에 새겨 넣는 행위는 또한 이 작업의 독특한 시간 의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단순한 일지를 넘어서는 일기의 시간성은 시간의 무정형한 흐름이나 시간의 붕괴로부터 시간을 지켜내려는 일종의 강박에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강박은 동시에 시간의 유한성 곧 시간의 사라짐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지곤 한다. 붕괴로부터 건져진 시간은 시간의 일시성에 예민하고 천편일률적 시간 진행에 적대적이다. 이로부터 한순간, 하루라는 시간의 분절 단위를 살아있게 하려는 지향이 생겨난다. <나뭇잎 일기>에서 매일 하나의 나뭇잎은 매일의 시간을 하나의 생명으로 전치시킨다. 일시적 시간이 한 일시적 생명과 더불어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빛남은 그것이 일시적이기에 또한 사라져 간다. 일시적 생명과 더불어 기록된 하루의 일과 혹은 그에 대한 단상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하나의 생명과 더불어 빛나지만 결국 사라져 간다. 인간의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인간들의 모든 행위가 시간 속에서 사라져간다는 것, 따라서 그 사라짐 혹은 일시성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의 현실적 조건이라는 것은, 이즈음 허윤희가 도달한 깨달음 아닌가 싶다. 매일매일의 ‘나뭇잎 일기’는 그녀가 이 시간의 경과에 기꺼이 몸을 담그고, 또한 이 과정을 끊임없이 담담하게 지켜나갈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다.
12. 이미 독일 유학 시절부터 허윤희는 꾸준히 벽화작업을 진행해 왔다. 2001년만 해도 <오두막>, <껍데기> 같은 대형벽화(453x445cm)와 함께 <대화>, <고향> 등의 벽화를 작업했고, 2002년에는 <떠남>과 공공벽화 <계단>을 진행한 바 있다. 2005년 유학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연 개인전 <날들의 피부>(인사미술공간)에서도 드로잉과 함께 벽화가 그려졌으며, 2008년의 개인전 <날들의 흔적>(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 그녀는 한 달 동안 전시장에 머물면서 전시장 전체 벽을 벽화로 가득 채웠다. 이후에도 베를린 쿨투어팔라스트 베딩 갤러리에서의 <난로Stove>(2012)나 2017년 금호미술관, <새> 벽화, 2018년 플레이스 막 전시 “유리거울”에서 그렸던 <천지>, 2020년 복합문화공간 수애뇨에서의 개인전에 등장한 벽화 <사라져 가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재난과 치유”에서 그려진 <빙하가 녹고 있다> 등 그녀는 수많은 벽화작업을 자신의 예술적 표현의 주요 매체로 삼아왔다.
허윤희가 벽화작업을 하는 것은, 이미 언급했듯 목탄 드로잉에 잠재된 가능성을 최대로 펼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몸의 기억을 가시화하는 목탄 드로잉이 몸의 스케일에 상응하는 크기와 강도로 확장되기를 원하고, 그로써 관객의 몸속 기억을 일깨울 수 있기를 바라는 듯하다. 그녀가 매 시기 자신이 그린 목탄 드로잉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재와 이미지로 벽화를 그리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벽화는 지워진다. 벽화의 일시성이 이슈로 떠오르는 것이다. <나뭇잎 일기>에서 확인했듯이, 그녀는 모든 생명과 행위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태를 수용한다. 또한 그 일시적 순간이 일시적이기에 아름답게 빛날 수 있고, 그리하여 영원할 수 있음을 긍정한다. 벽화를 사진으로 찍거나, 그리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거나, 이를 또 다른 전시에서 상영하는 것은, 한편으로 이 일시성을 극복해 보려는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또한 벽화의 사라짐, 일시성을 재확인하기 위한 절차기도 하다. 2018년 플레이스 막에서 실행된 벽화는 이런 맥락에서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이 전시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관객 앞에서 직접 벽화를 제작하고 마찬가지로 또 그 작업을 지우는 과정을 퍼포먼스 작업으로 실연한다. 이후의 벽화작업에서도 이런 그리기-지우기 퍼포먼스는 지속된다. 관객들은 이 퍼포먼스를 통해 벽화의 이미지를 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윤곽을 잡고, 생성되고, 수정되는 노동과 창조의 과정,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바로 그 이미지가 실제로 눈앞에서 지워지고, 흔적을 남기고, 결국은 사라지는 그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 이들 퍼포먼스는 벽화의 그려짐과 사라짐이라는 사실을 하나의 개념으로 전치 시킨다. 벽화의 생성과 소멸, 일시성=사라짐을 본격적으로 가시화하고, 전경前景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퍼포먼스는 그녀의 시간 의식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개념-장치가 된다.
13. 2020년경부터 허윤희는 ‘사라져 가는 얼굴들’ 혹은 ‘마지막 꽃’이라는 연작 타이틀로 ‘멸종 식물’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녀의 ‘사라짐’ 혹은 ‘일시성’에 대한 시간 의식이 생태주의적 지향과 연결되어 이런 작업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그녀는 이들 그림을 목탄 드로잉이 아닌 아크릴 물감 혹은 유화로 그린다. 이전에도 물감을 사용한 적은 있지만 부분적 혹은 일시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면, 이번 경우는 본격적인 운용運用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색채는 화려하기보다 분방하고, 선은 섬세함과 거리를 둔 듯 둔중하며, 꽃과 잎과 줄기의 형상 또한 소박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특이하다. 화면에 툭하고 얼굴을 들이민 꽃봉오리는 엉뚱한가 하면 천진스럽다. 잎과 줄기는 세밀한 묘사 없이 화면 여기저기 따로 또 같이 엇갈려 무심하게 자리를 잡는다. 작가는 숨겨졌다 드러난 듯 이들을 목도目睹의 시점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듯하다. 통상의 관찰 시점이나 공교로운 묘사 시점에서 벗어난 이들 식물은 투박한 아름다움으로 은밀하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과학자들은 현재 인간에 의해 발견된 800만 종의 생물 가운데 100만 종이 수십 년 내에 멸종할 것으로 예측한다. 거미줄의 줄이 한두 개씩 끊어지면 거미줄이 점점 약해지듯, 생물 종이 하나씩 없어지면 ‘생명의 그물망’이 끊겨 나가 우리가 사는 이곳 지구의 안전이 위험에 처한다. 지금의 이 같은 멸종위기는 6,500만 년 전에 발생한 다섯 번째 대멸종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의 하중을 의식하며 지금 멸종 식물을 그려내고 있다. 위기의 시대에 그림이,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아니 더욱더 안개 속이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감지하고 포착한 바를 드러내는 것 이상일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감지하고 어떻게 포착하는지는 뿌리칠 수 없는 예술의 본령에 속한다. 허윤희는 공동체의 삶의 위기와 개인의 내면적 진실과 예술이 뒤얽힌 다층적 상황과 대면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녀는 이중 어느 하나의 얽힘도 외면하지 않은 채 감지하고 포착하며 천천히 또 다른 모색의 도정을 걷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