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에 걸기

이연숙(리타)

1.

맨 처음 모니터를 통해 본 허윤희의 그림은 목탄 벽화였는데, 한 벽면을 꽉 채울 만큼 크고 거칠고 딱 그 만큼 ‘어설픈’ 표현 방식에 나는 첫 눈에 매료 되었다. 사실적인 재현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묘사된 단순하고 상징적인 화면들은 한 편으로는 밀도 높은 에너지가 폭발한 이후의 잔해처럼 보이기도 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표현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실험 만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목탄 벽화를 ‘그리고 지우는’ 퍼포먼스를 촬영한 영상은 나중에야 그의 작업실에서 볼 수 있었다. 이제 그림 자체보다는 작가가, 작가의 움직이는 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방진 마스크를 착용하고 육체 노동자의 폼으로 크레인 위에 올라가 아무 망설임 없이 ‘화이트 월’을 목탄으로 벅벅 문지르는 허윤희의 뒷모습은 우아한 미술관을 지저분한 노동의 현장으로 ‘전락’ 시키는 통쾌한 해방감마저 선사했다. 그러나 수 일 뒤에는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던 목탄 가루를 ‘점유’의 유일한 흔적으로 삼을 뿐 미련 없이 밀대로 완성된 그림을 지워 버리는 과감한 결단의 순간이 찾아 왔다. 바로 그 결단 이후에는 기념비로서의 벽화도, 작가의 고된 예술-노동의 증거도 오간 데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를 다 알고도 단숨에 ‘지우기’를 택하는 작가는 마치 바로 그 찰나에 자신을 거는 사람처럼 보인다. 빙하는 녹고있고, 그림은 사라져야만 한다. 이미 사라지고 있는 것과 그림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지우기’의 결단 속에서 반복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처럼 ‘잠깐’을 긍정하는 벽화와 되돌릴 수 없는 ‘지우기’의 퍼포먼스는 분명 회화 작가의 이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작업일 것이다.

이후에 차차 알게 되었지만 사실 허윤희는 ‘벽에 걸어 놓을 수 있는 큰 그림’보다도 그런 대작의 ‘소품’으로 분류될 수 있을 법한 부차적인 형식들의 전문적인 ‘아마추어’였다. 보들레르의 용법을 빌려, 결코 자기 자신에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어린 아이’처럼 새롭게 세계에 경탄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 특히 그렇다. 더욱이 전문가를 정주하는 이로, 아마추어를 탐험하는 이로 정의할 수 있다면 허윤희를 회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이라는 경계 위에서 갈 수 있는 한 멀리 탐험하기를 원하는 작가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의 작업은 거대한 벽을 채우고 지우는 퍼포먼스까지를 포함한 목탄 벽화 뿐만 아니라 멸종 위기의 꽃과 풀을 그린 드로잉과 페인팅, ‘일기’ 형식을 빌려온 나뭇잎 드로잉, 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구덩이 파기와 집 짓기, 쌀 봉투를 캔버스 삼은 드로잉, 자신의 드로잉과 콜라주로 ‘대가’의 책을 덮어 쓰는 ‘반달(vandal)’까지를 아우른다. 이러한 작업들은 회화에 비해서는 작은 화면과 짧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깊이’가 없다고 폄하되거나(드로잉), 특정 장소와 시간에 아주 잠깐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술’이라는 범주로의 편입을 거부 당하거나(퍼포먼스), 예술적 ‘가치’ 없는 낙서 또는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라는 이유로 자주 지워지는(벽화) 주변화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특성은 비교적 보존이 용이한 캔버스 회화에 비해서 자본주의 내 교환 가치로의 진입을 대단히 까다롭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들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시장의 논리에 의해 주변화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최근 몇 년 사이 허윤희는 새로운 시도로서 캔버스에 오일 페인팅을 시작했지만, 흥미롭게도 이 오래되고 ‘권위있는’ 형식은 그의 30여 년에 걸친 작업 전체에서 가장 짧은 역사를 가졌기에 다른 그의 ‘나머지’ 작업들과 그 위상에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허윤희의 작업 속에서는 중심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위계 없는 변두리’들’만이 있게 된다. 이처럼 허윤희가 회화라는 매체를 상대함에 있어 가장 비(非)회화적인 형식과 재료에 이끌리는 데에는 분명 단순한 취향 그 이상의 무엇, 존재론적인 차원의 ‘고집’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무엇이 개입하고 있을 것이다.  

2.

‘변두리’ 친화적인 작가인 허윤희는 생태주의 잡지인 『녹색 평론』의 표지 삽화부터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따라 매일을 기록한 『나뭇잎 일기』에 이르기까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예술가로서의) ‘말하기’ 방식을 통해 자연이라는 타자와 ‘함께 살기’를 제안해왔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행보일지도 모른다. 최근 십수년 사이 기후 위기는 더 이상 부정(“기후 위기는 없다”)도, 부인(“기후 위기가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른다”)할 수도 없을 만큼 구체적인 현실로서 체감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권에서는 이러한 위기에 긴급하게 응답하려는 급진적인 환경 운동가들과 생태주의-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행동주의가 이미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 잡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사실 국내에서 비판적 생태주의 예술(가)의 계보를 재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허윤희를 비롯해 비교적 최근 등장한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은 지금까지 ‘예정된 위기’로서 배경화되어 온 기후 위기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전경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요컨대 올해 여름 출범한 ‘기후위기를 앞둔 창작자들’[1]이라는 이름의 콜렉티브는 “기후위기는 미래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 관한 것입니다.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은 기후위기를 각자 고유한 언어로써 증언하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하며 행진하기, 발언하기, 노래하기와 같은 예술-실천을 지속하고 있다. 허윤희는 스스로를 ‘생태주의 미술가’ 또는 ‘생태주의 활동가’로 소개하지는 않지만, 이미 독일 유학 시절부터 시 쓰기, 일기장 ‘꾸미기’(<윤희 일기>), 집 짓기(<관(棺)집>)와 같은 생활-예술을 통해 고유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구축해온 바 있다. 허윤희의 전작들을 재조명하는 아카이브 전시 《9리터의 먼지와 오두막》(A.P.23, 2022)은 보다 적극적으로 ‘생태 미술’의 관점에서 허윤희의 작업이 일찍부터 품고 있던 자연과 인간의 본래적인 관계라는 생태주의적인 문제 의식에 주목하기도 했다. 기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에게 언제나 현재적인 것이다. 올해 열린 개인전 《잃어버린 숲》(갤러리 밈, 2022)의 작가 노트에서 “사라져 가는 우리 꽃들을 강렬하게 그리고 싶었다. 꽃들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강조해서 그리며 때 이른 죽음을 맞는 멸종식물들을 애도한다. 그들을 기억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돌아보고자 한다”고 말하며 지난 2008년 이후 지속되어 온 기후 위기를 다룬 작업들과의 일관성을 보여준 바 있다. 거칠고 ‘강렬한’ 붓터치와 헛발질 같은 스케치의 생생한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허윤희의 <사라지는 얼굴들>과 <마지막 꽃> 연작은 분명 멸종 위기 식물들의  ‘생명력’을 유출하기에 적절한 “사라지는 매개자”이리라.

물론 이들은–다른 모든 비판적 예술과 마찬가지로–정책을 만들고, 교육과 정보를 제공하고, 심지어는 대통령을 바꾸는 직접적인 수준의 정치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알다시피 세상은 그런 식으로만 변하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들 중 대다수가 오직 진보만이 변화라고 믿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앞으로 나아가고, 변형하고, 생산하는 모든 과정을 진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이는 누군가의 ‘때 이른 죽음’에 공모하는 파괴적인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한편 이미 사라진 대상을 ‘기억’하고 ‘돌아보는’ 퇴보의 제스처는 실현되지 못한 과거의 희망과 여전히 이 세상 어딘가에 정지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을 그들의 마지막 한숨과 연결되기 위한 안간힘과도 같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제스처인 동시에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에게는 전부인 제스처다. 어쩌면 걱정이 많은 누군가에게는 허윤희의 이러한 ‘돌아보는’ 경향성이 무(無)로, 텅 빔(emptiness)으로, 죽음으로 기울 수 밖에 없을 위험한 멜랑콜리아로만 보일수도 있겠지만, 본디 ‘애도한다’는 것이 그런 과정을 필수적으로 수반하지 않던가. 상실된 대상을 도저히 내 안에서 떠나보낼 수 없어 차라리 그것과 하나가 되는, 자기 자신과 상실된 대상을 분리할 수 없게 되는 바로 그런 과정 말이다. 이처럼 상실된 대상과의 우울증적 통합이라는 사태는 단지 사랑하는 가족, 친구, 연인의 상실이라는 사적인 사건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낙관과 실망 또는 공동체적 트라우마가 되는 비극과 같은 공적인 사건 속에서도 초래될 수 있다. 그러니 한 사람의 미약한 힘으로는 막을 수도 지킬 수도 없는 기후 위기를 바라보며 느끼는 무기력한 감정을 가리키기 위해 ‘생태학적 슬픔’(ecological grief)’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3.

사라지는 것들을 사라지는 방식으로 다루는 허윤희의 작업에 ‘이론’이라는 도구를 들이대기란 쉽지 않다. 흔히 이론은 위로부터 아래로, 중심에서 주변부로 뻗어 나가는 닫힌 체계이자 완결된 세계관을 의미하기에, 이론을 통해 우리는 의미를 무한히 열어두는 방법이 아니라 의미를 제한하는 방법만을 배우기 쉽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들뢰즈적 용법에서 ‘변두리-되기’를 반복적으로 실천하는 작가인 허윤희를 보며 내가 천천히 깨달은 것은 이처럼 ‘약한(weak)’ 삶-작품의 존재론적 양식을 설명할만한 이론적인 틀이 거의 부재한다는 것이었다. 한 작가의 ‘깊이’란 다루는 주제나 형식의 ‘진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고 익숙해질 수 없는 고집 또는 충동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허윤희가 왜 ‘정말로’ 멸종 식물에 이끌리고 왜 목탄이라는 재료에 애착을 느끼는지는 크게 궁금한 사안도 아니고 따져볼 단서도 아니다. 문제는 허윤희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변두리적 형식과 소박한–심지어 ‘감상적인’ 대상의 일치가 지극히 제한된 미술사적 범주 내에서만 가치있는 것으로서 탐구되기 쉽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한 극단에는 (특히 여성 작가의) 정물화라는 빈곤한 범주가, 다른 한 극단에는 (소위 사회 ‘문제’를 주로 다루는) 비판적인 예술-실천이라는 과잉-의미화된 범주가 존재한다. 전자는 조지아 오키프와 같은 위대한 화가를 ‘여성적인 감상성의 표현’이라는 편협한 테두리 내에서만 이해하려 들었던 특정한 종류의 편견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며, 후자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술의 쓸모를 가늠하는 강박적인 실용주의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강한’ 비평적 관점이 틀 지우는 해석적 장악력 아래서는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사라지기를 택하는 ‘약한’ 제스처,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전부인 제스처는 저항 없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이런 이유를 들며 나는 허윤희의 작업 전체를 하나의 완결적인 ‘작가론’으로 엮어 내기를 주저하는 나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허윤희와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들, ‘약한’ 것들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그들과 동일시했던 누군가의 말을 빌려오는 시도를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20세기 독일의 ‘문필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로 잘 알려진 에세이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행복의 관념 속에는 구원의 관념이 포기할 수 없게 함께 공명하고 있다. 역사가 대상으로 삼는 과거라는 관념도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미약한(shwach)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2]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인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이 기다려진 것이 아니라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한 “은밀한 약속” 때문에 기다려진 것이다. 실현되지 못한 안쓰러운 소망들을 언젠가의 우리에게 멀리 던지고 죽은 그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그 소망들을 알아 보리라는 것을 간절히 바랬고 또 믿었을 것이다. 그리해서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 “그들이 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라는 과거의 잔해로부터 언젠가의 미완수된 약속을 알아보고 그것에 응답하는 것은 곧 과거로부터 기다려졌던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과거가 이미 품고 있었던 구원자로서의 힘을 그것에 되돌려 주는 일이 된다.

결국 벤야민에게 ‘미약한 힘’이란 미래가 아닌 과거로부터 이미 우리에게 양도된 책임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를 보다 넓은 차원–지구 상에 존재했던,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을 포함하는–으로 확장시켜 본다면, 허윤희가 사라지고 있는 빙하와 숲, 멸종 위기 생물과 떨어진 나뭇잎을 단순히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만 재현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차라리 그것은 사라짐 속에서 그들이 언젠가의 미래에 송신했던 구조 요청의 신호에 대한 긴급한 응답에 가까울 것이다. 예술가의 ‘미약한 힘’은 그들 하나 하나를 구해낼 수는 없겠지만 ‘사라지는 것들’이 돌려 받기를 요구하는 유토피아적 소망을 동결시켜 언젠가의 또 다른 미래에 양도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모든 가정들은 잠재적인 상태로, 아직 실현되지 않는 가능성으로 무력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사라지는 것들이 ‘기다려졌던 사람들’인 우리에게 자신들의 소망을 모조리 건 만큼, 우리 역시도 그들의 소망에 우리 자신의 전부를 걸 수 밖에.

[1] ‘기후위기를 앞둔 창작자들’의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climateperformer/)

[2] 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 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길, 2015, 332p. 강조는 원문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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