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식물성

_허윤희의 ‘그림과 그리기’를 공유하기 위한 몇 개의 단상

 

  1. 동물에게 뿌리는 관념이지만 식물에겐 실존이다. 말 그대로 생명의 뿌리, 근원이다. 인간은 식물을 채집하고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뿌리의 기능과 이미지와 의미를 의식 안쪽에 각인했을 것이다.
  2.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뿌리는 식물에 있고, 식물의 뿌리는 땅과 하늘(천지)에 있다.
  3. 뿌리는 향일성(向日性)이 없다. 태양을 등지고 땅속을 향한다.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듯 뿌리는 실뿌리를 앞세워 흙과 하나가 된다. 뿌리가 흙과 결속하고, 잎이 햇빛과 공기와 만날 때 식물은 생장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천지와 공생하는 존재. 식물이 동물보다 훨씬 먼저 천지간, 천지인(天地人)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4. 고개 들어, 잎 다 떨군 겨울나무를 올려다보면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햇빛 속으로, 공중으로 뻗은 뿌리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뿌리는 땅속 나뭇가지다.
  5. 뿌리 뽑힌 자가 있다. 뿌리 없는 집안, 뿌리 없는 사회와 문화, 뿌리 없는 이념, 정치도 있다.
  6. 뿌리가 뽑혔거나 뿌리가 없는 삶처럼 남루한 삶도 없다. 반려견을 구할 때도 ‘족보’를 따진다. 순종인가 잡종인가. 인간의 혈통, 계보, 서열이 수직적 뿌리라면 학연과 지연은 수평적 뿌리다. 네트워크도 옆으로 퍼진 뿌리다. 전통, 유산, 전승, 계승도 뿌리와 밀접하다. 인드라망이라는 거대하고도 정교한 우주적 네트워크도 있다.
  7. ‘땅에 뿌리박은 삶’이 있었다. 우리는 토착 문화를 잃거나 잊은 것이 아니다. 선뜻 내준 것도 아니다.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빼앗겼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낡고 오래된 것을 버리고 새것을 얻었고 그래서 편리하고 풍요로워졌다고 어깨를 으쓱하지만 대부분의 새것은 ‘당의정’이다. 잘 포장된 폭발물인 경우가 많다. 새것을 얻는 만큼 잃어버리게 되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사람 혹은 시대는 많지 않다.
  8. 도시는 자연을 추방했다. 땅을 깎아내고 메우고 뒤덮은 곳. 인공적으로 ‘자연’을 만들어낸 곳. 도시는 땅을 없앴다. 땅이 없어지자 땅에서 우러나오던 공동체의 미덕도 없어졌다. 도시에서 땅은 부동산 아니면 개발 대상이다.
  9. 도시에는 뿌리내릴 땅(이때 땅은 실제 지구 표면인 동시에 흙의 메타포다)이 없다. 땅 없는 삶으로 이뤄진 사회는 유민의 사회다. 국경을 넘는 유민만 디아스포라인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디아스포라다. 뿌리 뽑힌 우리는 도시 안에서, 도시에서 도시로, 자국 내에서 끊임없이 내몰리는 ‘내국 디아스포라’다.
  10. 도시에도 땅은 있지만 인공물이다. 빌딩은 땅(지면)을 층층이 쌓아 올린 구조물이다. 60층 사무실은 지면을 180m 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지하공간은 그 반대다. 고층빌딩 전망대에 앉아 야경을 즐기든, 지하철을 타고 달리든 우리는 언제나 지표에 닿아 있다. 비행기나 배를 탈 때는 지표를 떠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늘에 있든 바다 위에 있든 육지의 길을 이어준다는 의미에서 땅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배와 비행기가 실어나르는 것은 길이다.
  11. 글머리가 너무 길어졌다.
  12. 허윤희의 그림에서 뿌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하다. 꽃, 얼굴(사람, 내면), 집, 배, 산, 빙산과 같은 여러 오브제(오브제라고 말하면 ‘소재주의’처럼 평가절하되는 느낌이 없지 않은데, 나는 오브제가 주제와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중 하나인데 그중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수행한다. 허윤희는 뿌리 없는 존재에게 뿌리를 내리게 한다. 집이 뿌리를 내리는가 하면(<배와 집>), 사람의 발도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워낸다(<발>).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나기도 하거니와(<머리에 바람>) 이 사람의 두 발은 분명 땅에 박혀있으리라. 다시 말하면, 그의 그림은 뿌리가 없는 것에서 뿌리를 ‘발견’하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강한 메타포다. 서로 만날 수 없는 것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그의 상상력은 시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13. 뿌리를 뻗는 집이라는 상상력은 얇은 사회학을 넘어 인류학으로 번진다. 북미 원주민은 집을 지을 때 주춧돌 아래에다 선인장 뿌리를 심는다고 한다. 그러면 집은 뿌리를 내려 땅-지구와 혈연이 된다. 집은 인공물이지만 집을 구성하는 모든 재료는 자연물이다. 집의 뿌리를 상상하지 못하는 우리 문명인이 미개인이다. ‘땅의 상상력’, 즉 지구적 감수성을 잃어버리고 천지자연을 향해 자신을 열지 못하는(未開) 우리가 미개인이다. 우리는 열려야 하고 늘 열려 있어야 한다.
  14. 허윤희 그림의 주역은 산업문명으로부터 배제된 생명체다. 뿌리, 꽃, 잎사귀, 씨앗 등등. 도시인(현대인)이 안팎으로 불안전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은 멀리 있지 않다. 허윤희의 그림이 강하고, 거칠고, 다급하고, 절박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천지자연과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이라고, 뿌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15. 그의 그림에서 인간-사람(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라면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고 나는 구분한다. 코끼리 앞에 서 있으면 인간이고, 출근을 하거나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람)의 윤곽이 희미하거나 여러 겹으로 겹쳐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자연과 관계가 어긋나면 인간-사람의 내면 풍경 또한 지옥과 같아진다는 메시지일 테다. 우리가 잃어버린 땅과 관계를 다시 설정하지 않는다면 울는 우리는 인간-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경고일 테다. 한마디로 망본초란(亡本招亂)!
  16. 뿌리는 식물의 근원이자 동물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나는 뿌리를 천착하는 허윤희 그림의 원동력 혹은 핵심 가치 중 하나를 ‘강한 식물성’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17. 식물은 우리 삶의 전모를 되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식물이 처한 사태를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다면 산업문명의 치명적 허(虛), 그리고 허약하기 그지없는 실(實)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허윤희의 강한 식물성은 ‘강한 메시지’다.
  18. 그의 그림은 식물을 통해 삶의 실제적, 실체적 뿌리를 드러내고, 한 걸음 나아가 사회와 시대 그리고 문명이 안고 있는 치명적 약점(급소)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의 관심이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식물에 집중되고, 급기야 녹아내리는 극지의 빙산을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19.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허윤희의 작가정신은 지구 생태계 전체를 품어 안는 대지모신(大地母神) 차원으로 크고 깊고 넓어져 있다. 나는 작품보다 작가가 더 커야 한다고 주장해오고 있는데 허윤희 작가의 경우가 꼭 그렇다고 생각한다. 작품보다 작은 작가가 의외로 많다. 작가와 작품의 일치를 넘어 작품보다 훨씬 큰 작가. 그런 작가가 지금과 다른 미래, 아니, ‘더 나은 오늘’을 위한 촉진을 이뤄낸다.
  20. 목탄과 ‘지우기 위한 그리기’에 대해 입을 열 차례인데 내겐 좀 버거운 주제다. 목탄은 천연에 가깝다. 연필심이나 붓도 자연에 가깝지만, 나무와 불이 만난 결과인 목탄에 견주면 사람의 손길이 제법 개입된 것이다. 목탄은 탄소 덩어리다. 원소-질료에 가까운 그림 도구다. 허윤희의 그림에 가장 어울리는 ‘붓’이다. 그가 목탄으로 나무를 그리면 ‘나무로 나무를’ 그리는 것이다. 자연으로 자연을 표현하면서 자연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다. 재자연화를 통한 자연화. 이같은 예술적 기획을 시민사회의 대안 운동과 연계시키기! 나는 이것이 허윤희 작가정신의 궁극 목표라고 생각한다.
  21. 허윤희는 지우기 위해 그린다. 목탄은 그리고 지우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그리기는 불멸성으로부터 멀찍이 벗어난다. 모든 작품은 작가가 과거에 창작한 것이다. 그런데 허윤희의 목탄 작업에는 과거가 없다. 미래도 없다. 그의 ‘그리기’는 실시간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진다. 일회적인 퍼포먼스다. 원본은 사라지고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알리바이를 남길 뿐이다. 이 난데없는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22. ‘죽어라, 그대가 죽기 전에.’ 13세기 페르시아 신비주의 시인이 남긴 경구다. 나는 저 시구를 떠올릴 때마다 예술의 운명이 꼭 저렇다고 생각한다. 모든 작품은, 그 작품이 진정한 작품이라면, 그 작품이 완성될 때 작가는 죽어야 한다. 작품과 함께 죽지 않는 작가는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 나는 허윤희의 ‘지우는 그림’에서 작품과 함께 죽었다가 새 작품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진정한 예술가의 면모를 본다.
  23. 생물학적 죽음 이전에 작품과 더불어 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진정한 작가는 ‘배반하는 작가’다. 상식에 속하는 언급이지만, 기존 예술을 배반하지 않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다음 세대 예술가에 의해 배반당하지 않는 예술가는 불행한 예술가다. 배반하고 배반당하는 예술가. 나는 이런 예술가가 예술의 진전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허윤희 작가는 곧 배반당할 것이다.
  24. 허윤희가 목탄을 사용해 ‘그리고 지우기’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지우면서 남긴다. 그가 붓을 들고 물감을 적실 때 그는 ‘강한 기록성’을 발휘한다. <나뭇잎 일기> 시리즈가 그렇고, 멸종 위기 식물 전시가 그렇다. 그는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 268가지를 전시한 다음, 관객과 함께 그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했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 초혼과 애도에서 나는, 앞에서 말한 허윤희의 대지모신과 같은 작가정신을 새삼 엿보았다.
  25. 식물성은, 동물성이 남성성과 가깝듯이 여성성과 가깝다. 식물성을 강조하는 것은 동물성을 비판하는 것이고, 남성성의 역기능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이다. 동물성에서 식물성으로. 이것이 전환이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낮에서 밤으로, 개인에서 공동체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에서 우애와 환대로, 생산력 제일주의에서 지속가능성으로. <녹색평론> 김종철이 주창한 것처럼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전환해야 한다.
  26. ‘끝이 시작되었다.’ 드라마 <체르노빌>에 나오는 대사다.
  27. 녹아내리는 빙산을 목탄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을 채색으로 표현하는 허윤희 작가는 산업문명의 ‘끝’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렇다. 끝이 끝나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끝이 끝나면 정말 끝이다. 공멸이다. 끝이 끝나기 전에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함께 시작해야 한다. 전환을 시작해야 한다. 뿌리의 감수성, 식물적 상상력을 회복하고 공유해야 한다.
  28. 목탄으로 ‘그리고 지우는’ 작업에 관해 더 생각해야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리기-지우기에 내재되어 있을 본질적 의미에 다다르지 못하는 내 역량이 못내 아쉽다. 더 읽고 더 생각하고 더 살아서 언젠가 ‘허윤희의 그리기’에 관해 두어 마디 보탤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29. 졸시 한 편을 허윤희의 작품과 작가정신 앞에 바치면서 거칠고 다급한 글을 마친다. 제목은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이문재_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