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되고픈 그 경계에 서서
이관훈 (큐레이터, 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
허윤희는 마치 자신의 살점을 도려내듯 육신과 영혼의 흔적들을 여기저기에 흩뿌리며 살아오고 있다. 때로는 새처럼, 바위처럼, 구름처럼, 잎처럼, 바다처럼… 그 흔적의 모양들은 자신의 분신처럼 이곳저곳에 환영의 자취를 남긴다. 그런 찰나 속에 벌어지는 온갖 행위의 흔적들은 저곳(밖, 세계, 가상)에서부터 이곳(안, 胎, 근거지, 현실)에 이르기까지 미적 사건을 돌출해내어 개인의 역사적 파노라마를 쓰게 한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저곳과 이곳에서 쓰이고(시와 기록) 그려지고(드로잉) 있는 ‘그림일기’가 미적 사건의 근거지가 된다. 자신이 구역해 놓은 프레임(인식적 망막)의 경계에서 새로운 영역에 대한 갈망과 도전을 꿈꿔본다. 어디에 서있거나 조망할지 모를 여러 시점(視點)의 세계(世界)에서 그가 걸어왔던 14년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저곳’ 세상에서 홀로 생활하며 겪는 인생의 여정은 고독 자체였다. 뜰(둥근 구덩이) 안에 갇혀 모국을 그리워하며 ‘자신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오두막에 우두커니 앉아 거울을 보고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그림일기를 쓰게 된다. 타는 목마름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원하지만, 삶의 근원인 물결 사이로 달밤에 비친 어머니의 잔상이 바람으로 날리며 고독한 삶은 지속된다. 그 외로운 외줄 타기는 꿈의 보따리를 끌어안고 홀로서기를 한다.
9년간 홀로서기를 겪은 허윤희는 ‘이곳’ 세상에서 그 시절의 기억의 소리를 듣고 안과 밖의 세상을 가로지르며 날개 짓을 한다. 씨를 뿌리고 배추와 나무를 심고 배를 타고 별밤을 헤며… 쓰는 그림일기는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삶은 이어지며, 그때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고통을 아물게 한다.
–이 글은 1996년에서 2007년까지 허윤희의 도록에 실린 작품의 제목들만 모아 재구성한 것이다.-
독일에서 9년이란 세월을 톡톡히 보낸 이후 국내 생활 5년이 되는 시점인 2008년에서 2009년 10월, 허윤희 작품에 대해 필자의 입장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근 1년간 세 곳의 전시 (사루비아다방 2008.11.19-12.19, 소마드로잉센터 2009.2.19-3.15, 가갤러리 2009.9.18-10.8)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각각 <날들의 흔적>, <한 잎의 생각>, <길들이기> 이란 제목으로 전시가 치러졌고, 또한 시멘트벽면의 전체공간에 목탄으로 벽화를 하거나, 화이트 큐브의 한 벽면에 벽화 그리고 종이에 드로잉 한 것과 나뭇잎 일기를 보여주거나, 오일로 캔버스에 작업을 하는 등 형식적으로 다른 변모를 꾀하였다.
각기 다른 세 공간을 다루는 내용의 모티프들의 원천은 9년간 내공을 쌓았던 ‘저곳’(독일)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유사성을 갖지만 표현해야 하는 공간과 지면에 따라, 캔버스에 따라 담아내는 유형을 달리했던 것이다. ‘저곳’은 고립되었던 섬에서 ‘무엇’을 애잔하게 갈망하는 욕망의 분출이었다면, ‘이곳’(국내)은 욕망의 분출을 끌어 앉고 달래는 그러면서 세상을 조망하고 관찰하는 포용의 태도로 변화를 가져왔다. 외로움이라는 실존의 무게를 두고 자기만의 얘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지금은 ‘나-너’의 관계를 지어가는, 그리하여 세 공간의 마지막 전시인 <길들이기>는 공존의 세계를 꿈꾼다. 스스로 자신을 바깥세상과 만남을 길들이고, 밖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을 걸고, 땅과 물이 만나 배가 집안으로 들어가고, 서로가 뒤엉켜 끊임없이 관계 짓기를 그는 원한다.
앞으로 그만의 ‘관계 맺기’는 대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읽어 가는가 보다는 그가 작업실 벽면에 2009년 6월 23일에 적어놓은 ‘몸이 생각을 끌고 가다’라는 문구에서 직감된다. 가령 우리는 시각예술을 읽어야 하는 언어처럼 교육을 받아 오거나 오감 중에서 시각적인 것으로 쓰는 것에만 한정되어 판단을 한다. 무엇을 보는 것 외에 만지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는 것 외에도 초감각적 지각을 움직이는 직감과 직관이 있는 것처럼 온몸으로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일까? 허윤희는 이러한 감각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타지에서 홀로 미친 듯이 열정적으로 살았다. 온실에서만 자라다 잡초 근성을 스스로 길러 여러 아픔과 상처들을 몸으로 이겨냈기에 가능한 감각의 언어를 구사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는 감각의 영역을 뛰어넘는 것으로 ‘저곳과 이곳’을 연결하는 맥락처럼 읽히며, 그간의 수많은 에피소드를 축적하는 것으로 들린다. 이미지를 애써 해석하는 것이 아닌 몸으로 숨겨진 대상(이미지+현상)을 찾아 느끼고 몸으로 그린다는, 몸의 철학적 사고를 두고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몸으로 사루비아 공간을 그려냈다. 사루비아 벽면과 직접적인 교감을 나눈 두 작가(이순주, 허윤희) 중 이 작가는 공간 전체를 뒤덮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 세계를 다시점으로 풀어냈다면, 허 작가는 천정을 제외한 공간 전체를 목탄으로 흠뻑 감성을 적시는 효과를 보았다. 한 달간 생각을 사루비아지하에 두고 나날의 흔적을 그려나갔다. ‘저곳’에서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그 몸과 사유의 흔적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사방(四方)의 벽면에 적절한 이미지 언어를 몸으로 그려 나갔다. 솔직히 난, 그가 뿜어낸 흔적들의 이미지 보다는 하루하루 쌓여가는 목탄 가루와 그가 밟고 지나간 흔적의 자취가 더 한 눈에 들어왔다. 의식하지 않은 ‘비움의 철학’이 그 잔영으로써 소임을 다하고 전시가 끝날 무렵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에 의해 그 잔영은 말없이 사라져갔다. 내 기억 속에는 그 잔영이 존재했으므로 그에 비친 사방의 이미지들이 빛이 났고, 그 숯의 냄새와 맑음이 자리하고 있다.
2개월 후 바로 이어진 소마 드로잉센터에서 <한 잎의 생각>을 펼쳤다. 사루비아에서 하려고 했던 잎을 그린 이미지와 기록들인 <나뭇잎 일기>는 책상위에 놓여 졌고, 여전히 사루비아에서 삶의 질문들을 던졌던 흔적들은 하얀 벽 전면에 드로잉으로 이어졌으며, <섬>과 <불꽃>의 드로잉 연작들로 채워졌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쌓여있는 사루비아와 화이트 큐브의 소마 공간의 벽면, 두 공간에서 느껴지는 간극이나 괴리감은 크다. 형용사적인 것과 창백하고 이성적인 것, ‘쓰일 수’ 있는 텍스트와 그림책처럼 ‘읽기만’ 하는 텍스트, 작품을 거부하는 것과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 날것의 야성적인 느낌과 세련된 백색 느낌… 등 그간의 전시 역사만 따져 봐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허 작가는 사루비아를 작품을 거부하는 곳에서 쓰일 수 있는 텍스트를 그려야만 가능한, 한 달간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할애해야 하는 시간의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시 6개월 만에 가갤러리에서 <길들이기> 전시가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벽면 드로잉을 하지 않고 캔버스와 종이에 유화로 그린 그림을 전시하였다. 사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허윤희 하면 벽면과 하얀 종이에 거침없이 빠른 속도로 그려내는 작가로 인식되어 있는데, 벽면에서 사라진 흔적들과 드로잉들로 기억된 잔상을 뒤로하고 회화로서의 표현의 가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일단 모험을 시작했다. 목탄과 붓질, 무채색과 다색,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 등 서로 반감되는 성질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물론 독일 유학시절 드로잉의 연장선에서 유화를 그리긴 하였지만, 색감 자체는 단조로웠다. 한동안 놓았던 낯선 매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자신을 <길들이기>의 그림 주제처럼 회화로 풀어내고 싶은 의지 또한 실험되어졌다.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마음과 행동처럼 상대성을 갖는 재료와 색채 그리고 시간성과 속도의 감각을 극복하려는 용기와 의지는 새로운 창작에 있어서 중요하게 적용되었다. 우선적으로 적용된 것은 색채의 회복이다. 거의 쓰지 않았던 다양한 색을 취함으로써 드로잉의 여백에서 얻지 못했던 회화적 환영과 깊이, 밑 색에서 올라오는 오묘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특히 <여정>이라는 작품은 회화와 드로잉의 경계의 지점을 잘 풀어낸 작업이다. 14년간 펼쳐진 온갖 상념들의 시간들을 보내고 무한한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한, 여유로운 느낌을 타자에게 배려한다.
허윤희는 보여 지는 것과는 달리 사람과 사람의 이음을 잘 잇는다.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상대방의 생각을 자신 보다 우선에 두는 태도와 순수한 열정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거기에 믿음과 뚝심까지 겸비하여 드로잉의 지층(이미지+시+현상)을 푸는 동시에 이제 회화까지 연결하여 관계 짓기를 하고 있다. 앞으로 회화의 지층(보여 지는 것과 보이지 않는 구조)을 풀려면 그동안 홀로 생각하고 빠졌던, 안 밖을 향해 관계 지었던 모든 이미지와 현상들을 땅 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그 위에 새로운 이미지 언어의 구조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본인만이 영위했던 틀 안의 반복적 행위를 한 차원 뛰어 넘어 다층의 이미지 구조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허공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시점을 넓혀 산과 바다, 바다와 하늘, 하늘과 도시, 도시와 사람, 사람과 집, 집과 땅, 땅과 영혼의 관계성을 현상학적 측면에서 무의식적인 노래로 다가가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