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타자에게로-경계선들의 감응

강선학, 미술평론가

1.

허윤희의 촉감은 내면에 잠겨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표면으로 흩어놓는 미세한 감성적인 포말에 붙어서 일어선다. 수많은 가선 사이에서 실선을 찾아가는 탐색, 철조망을 설치하는 재료로 쓰이는 철가시로 묶인 한 묶음 꽃다발, 너무 큰 꽃다발이라 일상적인 꽃다발이 주는 감성적 동조감이나 통상적 친근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노골적인 의미 제시도 아니다. 6개의 조각에 걸쳐 놓은 한 묶음 꽃다발 300x642cm 크기의 <헌화>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양이 질을 만들어 내는 순간이다. 그러나 꽃다발의 규모가 던지는 인상보다 형태가 줄 수 없는 깊이, 손에 잡히지 않는 촉감의 충격이 더 크다.

줄기는 철가시로 묶었고 한 손을 가볍게 댄 형태이다. 작거나 큰, 각기 다른 크기의 꽃잎, 옅거나 짙은, 좁거나 넓은 잎들의 정면과 측면을 확인할 수 있지만, 특정 꽃의 사실성과는 무관하다. 견고한 외곽선, 옅고 짙은 색상, 뭉개지고 덧발라지고 목탄의 눌린 자국이 뚜렷하다. 가선과 실선 사이, 무수한 가선 위에 실선을 찾아가다 뚜렷하게 드러나다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가선들은 잠재태로 형상 뒤로 물러나면서 때로 얼룩으로 형태의 외부이자 내부로 거칠게 자리 잡는다. 화면 속의 선들은 단호하고 분명하지만 덜 그리든가 진행 중인 형태와 형상으로 독특한 유동성, 비결정성으로 압인한 듯한 평면이다. 그 압인의 한편으로 무수한 가선을 노출시킴으로써 그 형상에 이르는 과정의 머뭇거림,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시도를 고스란히 목격하게 된다.

꽃과 뿌리, 산과 새, 인물, 이들의 얽힘으로 이어지는 선들은 어느 특정한 작품에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다. 단호함과 머뭇거림 사이에서 선과 면이, 가선과 실선이 비결정의 침묵으로 묶인다. 꽃잎의 암술과 수술의 형태 아래 선과 얼룩들이 빛과 어둠으로 숨고 드러난다. 형상들은 묶였다 풀렸다 순환으로 이어지면서 목탄의 질감은 손끝의 손거스러미처럼 예측불허의 통각을 불러일으킨다.

인물, 식물, 배, 강, 새와 날개가 서로 혼성되면서 병치, 구성되는 <기억의 다발> 연작이 보여주는 인접성은 다급하고 애잔하다. 체계적인 공간이 아니라 병치적 공간 구성은 자신의 질문을 성찰하는 체계보다 다급하게 다가오는 일방적이고 느닷없는 질문의 연속에 훨씬 가깝다. 형상을 잡아가면서 구성의 전체성을 조정하는 응집이 아니라 묘사하고 증식해가면서 확산하는 화면이다. 형상은 체계적 공간이 가지는 의미의 명료성보다 소재들을 기표로서의 보조관념 사이를 떠돌게 한다. 소재들에 혼신을 다해 감응하는, 체계에 집중하기보다 소재와 전체화의 의미를 흩어버리는 개체화가 두드러지는 효과다. 목탄 가루처럼 질문 자체가 부서지고 다른 것들과 혼성되면서 흔적으로 남고, 정작 자신이 물었던 첫 질문에 다시 와 있는 자신을 보여준다. 자신에 대한 탐색은 마치 목탄의 검은 색과 희부연 흔적들, 끊임없이 선으로 이어가는 행위와 자기 인식 사이에서 대상의 묘사나 이야기를 재현하기보다 직정적이고 촉감적인 정동으로 드러난다. 질서정연한 질문과 탐색, 그리고 답에 이르는 여정보다 지금, 이 순간에 당면한 자신에 관한 질문에 방기(放棄)되어 있다. 그것은 병치적 구성일 수밖에 없는 <기억의 다발>에 대한 필연성을 담보해준다. 그런 구성이야말로 형식과 내용에서 그녀만의 표현으로 나아가게 한다.

둥근 덩어리 안에 희미하게 얼굴 윤곽이 보이는데 실은 옆으로 쓰러진 화분 속에 드러나는 얼굴이다. 화분 밖으로 그 속에 있던 식물의 뿌리와 줄기가 나와 있다. 자신의 정주지에서 뽑힌 모양새다. 그 옆으로 팔이 이리저리 여러 동작으로 움직이는 것을 동시에 보이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시차에 따른 몸의 움직임과 정지를 현시한 것이다. 식물성의 이미지가 다시 움직임을 얻는 순간이기도 하다. 몸짓의 차이를 동시성으로 표현하려는 의지는 알(둥지), 새, 식물들이 겹쳐 형상화되고, 알이 새가 되고 새가 배와 꽃으로 연성 되는 이행으로 드러난다. 사물과 사물, 사물이 가진 시간적 공간적 규정이 철저하게 무시되면서 얻어지는 화면이다.

커다란 발이 고목처럼 화면 중앙에 놓여 있고, 발아래로 뿌리가 내리는 형상은 자신과 자연을 일체화하는, 단순하지만 그녀가 가진 세계의 이해를 보여준다. 그 발아래 돌로 쌓은 축대 위에 한 인물이 누워 있고, 그 옆 사람은 머리 위로 무성하게 가지가 일어나고 발아래로 뿌리가 내려 식물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화면 전체를 감싸듯 화면 위쪽에 엎어진 듯한 인물의 등 뒤로 뾰족하게 날개인 듯 새싹인 듯 새로운 형상이 돋아난다. 느닷없이 화면 왼쪽에 조각배를 저어가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런 환유적 접근, <기억의 다발>은 명확한 개념이나 총체적 형상을 제시하기보다도 연상적인 속성이 강한 인접성 상상력을 근저에 두고 있다. 따라서 사물의 실제 윤곽이 불투명해지는 대신 기표화 된 소재의 밀도와 물질성이 강화된다. 그것은 그녀가 병치하는 사물들, 소재들이 떠도는 기표로, 기표의 무한증식, 미끄러지는 기표라고 부르는 독특한 현장을 이끌고 있다. 시간도 공간도, 사물 간의 차이도 없는 혼연한 세계다. 뚜렷하게, 때로 사물 간의 윤곽선이 흐려서 서로 경쟁하는 그런 특징이 그가 그려내는 내용과 형식을 유도한다. 배 가득 실린 손 <여행-떠남> <여행-물결>은 손이면서 막 돋아나는 새싹 같기도 하고 화면 상단 끝부분에 묘사된 희미한 배와 인물을 위협하는 파도이면서 무사히 안착하기 바라는 기원이기도 하다. 알 속에 탯줄로 연결된 세계 <여행-탯줄> <여행-동굴 밖으로>를 그리듯 바깥과 맺어지는 관계와 바깥으로 떨어진 형상들은 얼굴과 물고기, 나무와 물의 이미지로 이어지고 겹쳐지고 혼성되어 간다. 물의 이미지가 작품 전체를 이어가는 점도 주목된다.

난로가 놓인 벽에 <난로>의 연기를 형상화한 대형 벽화는 난로의 따뜻한 공기가 방안을 감싸고도는 선들을 형상화하고, 그 선들은 공기를 움직인다. 그 공기의 흐름, 연기가 꽃의 형상으로 피어나는 물질적 상상과 사유는 그녀의 문학적 감성에 따른 환유의 수사와 다르지 않다. 꽃을 그리든, 나무를 그리든, 인물을 그리든, 그것은 언제나 거칠고 직접적인 선들의 단호함과 그 사이로 목탄의 흔적들이 묻어나면서, 대상과 형상 주위를 감싸고 휘돈다. <여행-불을 붙이다> <여행- 빛을 품다> <여행-고치> <여행-동굴 밖으로> 들은 대상을 주시하면서 그리거나 주변의 상황을 주지하면서 다가간다. 목탄의 활용과 표현은 재료 과잉, 감성 과잉의 시대에 비교할만한 견제와 절제로 수없는 가선의 주저함이 도리어 침묵으로 보는 이를 몰아가면서 감응케 한다. 그것은 ‘불을 붙이기’보다 불을 피우는, 꽃을 피우는, 바람을 피우는 촉감이다. 관념이 아니라 삶이 살에 닿는 직면과 다르지 않다.

목탄으로 대상에 접근할 때 목탄이 가진 속성이랄 수 있는 부서지기, 흩어지기, 흔적, 가연성 등의 비결정적인 특징은 형태 묘사에 그리 적합하지 않다. 다른 소재와의 연결성에서도 구축보다 해체적 느낌이 더 강하다. 이런 특징은 대상의 묘사를 모호하게 하지만 그 대가로 드러나는 정황, 내면성에의 침잠에 적의한 효과를 얻는다. 부서진 형태, 불명료한 서성거림, 형태의 해체 혹은 미완의 머뭇거림이 주는 의외의 지점이다. 목탄이 가진 묘사의 부정적 성질로 드로잉 한다는 것은 지나감, 순간, 지워짐, 흔적, 선, 리듬, 운율 등의 시간성의 다른 말이자 행위와 행위 대상을 하나로 수용하는 일이다. 그것은 정지와 움직임, 이것과 저것의 차이들이 만드는 윤곽선 혹은 경계선의 경쟁을 목격하게 한다. 끊임없이 위협받는 윤곽선 속에서 생성되는 이미지들은 “관계들을 아무리 (접속사를 사용해) 연달아 나열하더라도 세계의 전체가 되지 않으며, 세계의 정해진 전체가 없기 때문에, 뭔가의 관계를 제거하더라도 나머지가 정해지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 준다.

  1.  

앞에 언급한 작업은 전체의 흐름 아래 내용과 형식, 화면의 회화적 섬세함을 구축하는 유빙과 비교된다. 즉발적이고 직정적인 세계와 시간을 두고 구축되는 세계의 차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즉발적인 선들이 결코 노골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게 아니라, 감정의 섬세함을 위해 끊임없이 가선과 실선 사이의 층을 오가며 감추고 드러내는 것도 분명하다.

가만히 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유빙 아래로 알 수 없는 검은 색으로 얼룩져 빙하가 흐른다. 그러나 <빙하와 도시>가 한 도시의 풍경을 담은 배임을 알아채는 순간 뱃머리로 나아가는 힘들, 움직임, 속도를 느끼게 되고, 그리고 움직이는 얼음덩어리 사이로 얼핏얼핏 드러나는 흔적들, 제스처들은 풍란이 바위에 붙어서 생존하듯 유빙 아래 스며든 삶의 모습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빙하가 녹고 있다>에 유빙에 갇힌 인물의 제스처, 그것이 안겨주는 이미지는 마치 뭉개진 목탄 흔적처럼 본래의 것들, 가능했던 무수한 선들과 형태들이 삶의 면면으로 읽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라는 서사가 너무 쉽게 드러나 그가 구사하는 목탄의 색과 선과 면, 흐림과 명쾌함의 이중성을 단조롭고 진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노골적인 서사적 이미지가 오가는 표상의 진부함, 그리고 드로잉 너머의 잠재된 것들이 드러나고자 하는 아우성과 의미들의 혼성 역시 그런 부침과 다르지 않다.

유빙은 물의 다른 형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양가성으로 이루어진 객체이다. 물과 얼음, 눈은 동일 성분이면서 다른 것이다. 그들의 관계는 끊임없이 녹아가면서 형태가 바뀌는, 때로는 얼어가면서 몸체를 불리는, 불확실한 윤곽과 얼룩들로 뒤덮인다. 고체이면서 액체인, 물이면서 물 아닌 것, 부드러우면서 딱딱한, 고정된 것이면서 유동하는 것이다. 유빙의 흰색에 대비, 검은색으로 그것들을 받치고 있는 선은 마치 처음부터 거칠게 긋고 지우는 과정에서 흐름을 만들고 물결이 가른 움직임으로 생성된다. 하얀 덩어리의 딱딱함과 무게로 묘사된 배나 배 위의 도시를 서사적 움직임으로 이끈다. 그러나 서술로서 현실적 설명에 매이는 위험이 없지 않다. 그런데도 얼음산 위에 묘사된 배, 도시, 꽃, 산은 재현의 욕구로, 언어의 한정된 의미, 기의에 묶여 있기보다 기표로서 미끄러지고 무한 증식되는 감응으로 작동한다.

온대림이나 아열대의 습기 많은 환경에서 꽃을 피우는 풍란, 그 꽃들이 유빙으로 솟은 바위산 혹은 얼음산 기슭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아래로 빙하가 흐른다. 현실적 정합성이 없는 이 풍경도 시야를 넘어서는 크기에 직면할 때, 실은 그녀의 작품 앞에 섰을 때, 그것은 서술적 분별이 가능한 객체가 아니다. 거대한 냉기와 검은 선들과 선들이 만든 흔적들도 뒤얽혀 드러났다 잠겼다 사라지는 정동적 사건이다.

<빙하와 도시>가 주는 인상적 서술에는 이야기를 만들 때 생기는 묘한 이질적인 저항 때문에 어색함이 없지 않다. 구체적인 도시 정경의 묘사나 산이라는 대상의 묘사는 사실, 묘사로서보다 암시나 요약적 표시에 가까운 것인데, 정황적 묘사가 강조되면서 목탄이 가진 비결정성, 불확실성, 비묘사적 우연성이 주는 유연성과 가선과 실선 사이의 현시와 잠재의 이중적 성격이 의도적인 고의성, 진부한 주제 의식 아래 부대낀다.

거대한 얼음 바위, 얼음산에 핀 풍란은 유빙과 산의 묘사가 아니다. 바위 위에서 생성하는 하나의 운동, 작고 다양하게 생성되는 힘이다. 특정 꽃이 아니라, 꽃이 피는 시간과 꽃의 향기가 뿌리내리는 정황, 유빙에서 피어나는 생성력이다. 그것은 유빙을 붙잡는 대상과 흔적으로 흩어지는 힘을 붙잡는 것이다. 현실재현의 표상이라는 진부한 소재주의로서 내용적 읽기를 차단한다. 게다가 물은 일정한 밀도를 갖는 유연한 면이 아니라 선의 굵기, 겹침, 뭉개진 흔적이 만드는 균일하지 못한 움직임, 운동으로 해서 내면의 힘, 깊이, 내적 불연속성과 비균일성으로 세계 전체를 바라보게 한다. 이번 전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유빙에 갇힌 인물 의 흔적, 제스처가 드러나는 형상은 작품 읽기와 수용을 통상적인 형상으로 되밀어낸다.

산과 꽃을 그리고, 바위와 물, 도시와 배, 얼음덩이의 느린 속도는 현실 표상이기보다 기호의 물질성이 강화되고 떠도는 기표로서 공간 이해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에서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지를 알고 싶다는 형태적 이해는 단순하고 진부한 재현의 욕망이다. 그런데도 그 진부함을 넘어서는 어떤 힘은 선을 그으면서 시작된다. 소재와 주제는 뭉개지고 계기화된다. 유빙 속의 사람들, 배들, 도시들, 꽃들은 상투적 의미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미끄러지는 기표들로 내재된 상상력을 격발시킨다. 묘사한 것과 지워진 것, 의도적인 지우기와 의식하지 못한 행위 사이에 생성하는 지우기가 가지는 가선과 실선은 침묵과 언어 사이의 층위의 다툼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드러나고자 하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자 하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언어를 벗어나고자 하며, 얼마나 많은 것들이 형상에 갇히기를 거부하는가. 침투하는 선과 형태들, 면, 농담, 질감들의 경계에서 순치되고 때로 저항하는 선, 형태 간의 경계선들이 인접하며 경쟁하는가. 그것들은 관계로써 공간과 시간을 생성한다.

오늘날 가시화하기 위한 온갖 재료들의 활용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표현이며 그 물성을 하나의 심리적 움직임으로 포착해서 표현하려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그로 인해 우리의 표현영역과 표현 가능성이 무한해졌지만, 어떤 것도 표현으로 가능해졌기에 때로 무가치를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허무주의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목탄이라는 오래된 재료와 드로잉이라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표현은 풍요 속에서 빈곤함이 가진 광휘의 진정성을 안겨준다. 허윤희 작업은 무엇보다 한 개인이 가진 섬세한 심리적 층위와 간절하고 애틋한 생명에 대한 천착을 보여준다. 한 시대가 요구하는 생명이라는 거대 담론과 비교되듯 단순명료한 재료로 한 인간의 실존적 물음을 이렇게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호화스럽고 찬란하고 감정적 낭비에 가까운 함성들 사이에서 그녀는 차분하고 밀도 있게 자신과 우리의 존재, 그 깊이에 있는 실재=감각을 애틋하게 일깨워준다.

목탄과 지우개, 지우개가 손가락이기도 거즈이기도 스펀지이기도 실장갑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종이와 행위로 움직임과 욕망(그리기)으로 그리기를 이끈다. 주체가 아니라 주체 없이, 움직임이 움직임을 만나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윤곽선 간의 경쟁으로 둘 이상의 물체가 동시에 묘사된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힘들의 경쟁으로 상호침투하면서 다른 사물들, 인접한 타자들의 경쟁으로 새로운 힘을 보여준다. 그 힘은 내성적 성격에서 오는 것이자 “과정의 결과 혹은 중단 상태에 놓인, 과정 자체가 예술작품”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43x34cm의 작업이 있는가 하면, 190x260cm도, 300x642cm도, 크기를 재는 것이 무의미한 벽면을 가득 메운 드로잉 퍼포먼스도 있다. 벽에 그린 <배추> 2006년 작품은 아예 크기가 표시되지 않았다. 벽과 목탄, 식물과 물, 성장과 소멸, 일상과 초월적 대상으로 허윤희의 세계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작업이다. 대상의 묘사든, 심리적 충동이든 선을 그으면서, 지우면서, 물과 식물, 바람, 분출과 고임의 이미지로 점이 되고 선이 되고 공간이 구축된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 선이 뭉개지고 겹쳐지면서, 실컷 만든 형상들이 무시되고 형태 일부분이 지워진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흔적을 남긴다.

벽에 그대로 혹은 그 위에 걸거나 종이를 붙여 놓고 그리기 과정을 보이는 작업은 사실 현대 조각에서 흔히 말하는 무장소성, 무거처성, 장소의 절대적 상실을 연상하게 한다. 벽화에서 캔버스로 회화작업이 가능하다는 점은 장소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장소성에 대한 이탈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자신의 행위와 하나 되는 순간이자, 그 순간에 생성되는 형상들이다. 이는 구체성과 추상성, 대상과 행위를 분리불가능 하게 하면서 우리의 지각과 감성을 작품 속으로 몰아가는 힘들의 장소가 되게 한다. 선과 면 사이, 형태와 흔적 사이, 구축과 해체 사이, 대상과 일탈 사이에서 의미의 떠돎, 기표화 된 언어의 밀도와 물질성을 만나게 된다.

3.

대상이 없지 않지만, 대상에 대한 존재감보다 대상을 만나는 자신에게 충실했던 것을 목탄 드로잉 작업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요즘 채색 작업은 자신에 관한 관심보다 타자, 자신 바깥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일상의 단조롭고 구태의연하고 느슨한 풍경과 꽃에 접근해서 그녀가 보이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양가적 작업에 대한 감수성은 그리기의 전환이라기보다 세계에 대한 다자화 된 감흥의 일단일까. 아니면 상실된 타자와의 공감, 타자의 귀환을 통해 미래를 열어가는 것일까.

서울 성북구립미술관 전시(2025.7.8.-9.7)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방형과 장방형의 작은 판넬의 채색화들이다. 바다, 태양, 물, 빛, 바람, 해변의 산자락들, 꽃과 나무들이다. 꽃에 대한, 식물에 대한 감탄은 때로 세계의 신비를 만나는 것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소모하거나 감탄하면서 과잉의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꽃을 그리면서 일기를 쓰듯 자신의 <사라지는 얼굴>에 대해 쓴 글이 그렇다. 도리어 감정의 과잉을 드러내거나 내용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상도 부정하기 힘들다. 그림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이를 더 보태려 하는 이유, 절박함이 무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혹 아포리즘의 유혹이자 자기 감성의 함정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정직함도 솔직함도 아니다. 천진함은 더더욱 아니다. 사물에의 감응보다 사회적 이슈를 그린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욕망을 드러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고 묻는 것이다. 사물의 이해가 사회적임도 분명하고 그에 대응하는 작가의 의식이 사회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기 그림에 대한 의미과잉이라는 지적도 어렵지 않다.

풍경은 내 밖의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대에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그린다. 이번에 내놓은 146점의 풍경화가 그곳, 그 시간대에 그려진 것이다. “<해돋이 일기>는 날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재료로 그리기”로 한 작업이다. 구성도 색채도 그리는 기법도 차이가 크지 않다. 그저 비슷한 것들의 연속이다. 진부한 풍경화다. 그런 풍경, <해돋이 일기>는 무엇일까. 그것도 이른 아침 해돋이 전후에 제주도 서귀포 중문의 한 바닷가에서 같은 시간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점으로 2023년 10월 16일부터 시작한 그림, 146점을 이번 전시에 내놓은 것이다.

그곳, 그 시간에 그리는 장면이라 몇 점만 보아도 이게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게 된다. 무얼 그렸지, 하는 질문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리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인지의 순간, 반복은 차이를 일으키고 차이는 ‘원본’의 힘을 빼앗는다. 그러고 새로운 힘을 넣게 된다. 비로소 풍경화 앞에서 알려고 하는 충동, 재현의 요구나 확인에서 벗어나, 이제 그 자체, 작품 자체를 보게 한다. 그림 속의 장소성과 시간성이 아니라, 비근한 것이 안겨주는 다른 느낌, 새로운 것에로의 진입 가능성이 열린다. 통속적 호기심과 확인이 아니라 그림과 만나는 그 순간의 감성에 충실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의 입장은 어떤지 여전히 궁금하다.

풍경을 바라보면서 풍경을 그리자는 것일까, 흔한 말로 풍경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그리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마치 그렇게 보아냄으로 그것의 실체를 알게 되는 그런 순간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렇게 묻다가 그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피할 수 없이 만나는 실재 아닌가. 같으면서 같지 않은 그것. 객체로서 언제나 만나게 되는 것, 작가 의지와 무관하게 펼쳐지는 순환하는 세계, 그리는 것으로 풍경과 공감하는 일이지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감성적 수용일 뿐, 그것은 그것대로의 세계다. 세계는 철저하게 작가의 의지와 무관한 대상이고, 그림은 작가의 의지이다. 그래서 그림은 대상과 주체가 어긋나는 지점이자 서로 간의 물듦이기도 한다.

어느 <해돋이 일기>에나 등장하는 태양은 이제 태양의 빛이 아니라 화면 어디쯤, 어떤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상호 관계로서 역할로 전환된다. 크기나 위치, 색상이 만드는 긴장, 균형으로 내용과 무관한 조형적 자장(磁場) 속에 있게 된다. 캔버스라는 사각형의 틀과 그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원의 크기와 색상이 만드는 객체이다. 같은 구도, 같은 소재, 비슷한 시간대, 다양체로서 자연의 풍광이 색상의 변화, 붓 터치가 주는 밀도들의 역장(力場)으로 내놓인 것이다.

목탄작업이 나, 자아, 내 속의 나밖에 없는, 나를 타고 나를 들여다봤다면, 이제 타자인 풍경조차 나를 보듯 들여다본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가 없다. 풍경이 그곳에 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철저한 만남이다. 아침 해돋이를 그린 작품을 봤을 때의 여느 풍경화와 다르지 않다는 곤혹스러움과 한 시선으로 146장을 그린다는 의미심장한 양가적 감정은 이런 것이다. 146 장의 해돋이 그림은 한 장소에서 같은 크기 (46x61cm)로 그린 같은 풍경이다. 그녀가 마주한 대상들만 있다. 초기 목탄화에서 보았던 환유적 접근이나 이해가 아니라 주위를 직면하는 감응이다. 같은 장소에서 그렸는데 같은 것이 없다는 점이 그런 것이다. “주위의 사정에 감응하는 정념이야말로 ‘개체화의 원리’인 것이다.” 다르게 말해 해돋이의 풍경은 세계의 실재가 아니라 그때그때 개체로서의 실제성을 지각한 결과일까.

그녀의 해돋이는 전체로서 통일적 이미지를 얻는 것이 아니다. 화면 위 2/3 지점에는 언제나 산과 언덕이 자리한다. 그 위로 구름의 형상들이 대기의 조건과 아침 햇살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 아래로 언제나 파도 넘실거리는 바다가 펼쳐진다. 해변은 뭍으로 들어서는 곳이라 망망대해의 이미지라기보다 언제나 변화무쌍한 일상의 현실경이다. 변하지 않는 고정된 곳으로 산과 언덕이 있다면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물결이 그 아래 있고, 아침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대기의 흐름과 언제나 그대로인 태양이 있다. 움직이는 것과 불변하는 것들이 접면 하는 곳이다. 물결이 가변적이고 우연적이고 일시적 형상이라면, 태양은 일정하지만 일정하지 않은 현상으로 만나게 된다. 같은 시간대, 같은 장소인데도 똑같지 않다는 것은 ‘전체화가 불가능한 단편들의 세계’ “공간적인 자연의 갈가리 찢김이다. 자연의 균일성은 공간적으로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법칙’이, 아니 인과성이, 비의미적으로 절단되어 있는” 풍경이다. 그 장소를 보고 확인하기 위한 재현이 아니다. 대기를 느끼는 것이다. 실재를 직면하면서 감응하고 실재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대기처럼, “색은 우리 내부로 들어와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그림 그리고 글을 쓸 때 그 모든 것이 특정한 정동 및 성향과 함께 하도록 만든다.”

이런 특징은 꽃 그림 <사라져 가는 얼굴>에 와서는 좀 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객체를 묘사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 작업이지만 꽃 그림은 사물 전체가 아니라 꽃송이를 중심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생물도감 같은 그리기는 아니다. 개체의 속성을 무시하고 회화적 감응만 대상으로 삼고 있지도 않다. 30여 점의 꽃들은 작은 정방형과 방형의 캔버스 중심에 수술과 암술을 놓으면서 꽃잎과 주변부를 펼쳐낸다. 기하학적 틀에 대비되는 다양체의 형태로서 꽃의 개별성은 꽃이라는 생태학적 관심보다 형태와 색채의 에로틱한 형상미에 눈이 간다. 작은 기하학적 공간 중앙에 자리 잡은 꽃의 다면체와 요소의 배열은 주어진 공간의 완강함과 꽃의 다면체 간의 힘의 대응 혹은 경계선들의 경쟁으로 바뀐다. 형상과 비형상의 긴장은 구성의 소박함이라기에는 너무 집요한 접근이다.

그녀의 그리기 혹은 긋기는 입체의 공간이 아니라 내면적 공간으로서 깊이를 목탄으로 생성한다. 이차원의 밋밋한 무변화를 드러내는 선과 침묵하는 선들, 저항하는 가선과 실선들이 경쟁하는 층들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채색은 명료성, 묘사성, 결정적 형태감, 필연적인 통제로서 사물의 객관적 묘사에 더 충실하다. 그리고 색채는 혼합되므로 분열되는 형태를 다시 재구성하고 통합함으로 사물에 다가간다. 다양체이지만 하나로 통합하는 일관성의 구성, 다양한 것을 넘어서서 하나로 인식하는 작업이다. 색채가 충실할수록 형태도 충실해진다고 한다. 그것은 시지각의 문제가 아니라 ‘기어코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감응의 문제이며 “메를로 퐁티의 관점에서 감응한다는 것은 세계에 열려 있다는 것이며 세계의 포옹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내적 존재 안에서 그 빛줄기와 소리 울림에 공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감응적 세계에는 지각의 대상도 지각의 주체도 분리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색채와 형태의 과잉은 사물의 객관적 대응보다 감정적으로 위장되는, 감성을 통제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 메모는 이런 사실을 더 노골적으로 읽게 한다. 그러나 좋은 글은 작품을 더 들여다보게 하지만 때로 ‘글만큼만’ 이해하게 한다. 보는 것이 아니라 읽게 한다. 그런 욕망은 자신을 자신의 감정에 혹은 사회적 의미를 표현하려는 소박함으로, 문학과 시각이미지의 혼성이라는 시류를 너무 의식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더구나 ‘관념보다 이미지가, 의미보다 감각이, 현실보다는 무의식이 강화’되는 환유적 감성이 역으로 관념, 의미, 현실에 치중하는 서사가 자칫 진부한 풍경화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없지 않다. <빙하-도시> <사라지는 얼굴>은 그런 면에서 까다로운 소재들이다.

4.

손끝이 종이에 닿아 자지러지는 촉감. 목탄을 문지르자 그렇게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물음과 캔버스에 물감을 발라가는 이른 아침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무수한 가선들 사이에서 대상의 형태가 잡혀가는 그 순간, 동시에 형태를 거부하는 윤곽선들의 완강함이 경쟁하듯 부딪치는 화면.

종이 섬유 위로 박히듯 스미는 목탄과 제 몸을 그대로 엉겨 붙이는 아크릴 색상 사이에서, 비묘사적인 재료로 드러나는 내면의 조우나 대상에 대한 긴밀한 색채 구축으로 드러나는 양가적 인상은 한 작가의 변화가 아니라 세계를 읽어내는 양면성으로 읽힌다. 그리기로서 주체의 자리와 그려지는 대상으로 타자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오는 어긋남이 작품을 보는 내내 힘겹게 따라다닌다.

허윤희의 작품은 형상에 접근해가는 경쟁하는 윤곽선들의 감응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모든 선은 색을 가진다. 아니, 모든 선이 색이다. 그리고 모든 색은 선을 따라 나아간다. 색으로 칠해지든 선으로 그려지든, 글로 쓰이든, 선은 마치 석탄 타르에서 다양한 합성 색소가 나오듯이 주관과 객관, 정동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융합에서 쏟아져 나온다. “타우시스는 ‘색은 걷는다, 그리고 걸어감에 따라 색은 변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색은 생각을 겉치장하거나 그 형식을 갖추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사고의 원천이 되는 그 매질이다.”

목탄의 우연성과 흔적, 채색의 명료함과 의도성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담아내는 재료와 소재에 관한 집요함은 허윤희 자신에게서 타인에게로 나아가는 변화다. 그녀에게서 목탄이라는 재료는 자신의 행위이자 정신이다. 말하자면, “재료란 예술가가 결정을 내려야 할 것으로서 이들에게 다가오는 것 모두”인 셈이다. 목탄 혹은 아크릴의 재질감, 재료의 특징은 목탄과 채색 사이의 차이만큼 더 크고 비동일성으로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의도와 재료의 저항 사이에서 그의 형식과 내용이 구성된다. 그것은 때로 의도와 무관한 새로운 지평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목탄이 아니면 불가능한 세계로 이입시켜주는 것이다. 아크릴은 채색의 세계, 채색으로 드러나는 구축의 감성이자 그 감성이 곧 세계다. 말하자면 재료가 곧 형식이며 어법이자 내용이다. “재료가 실로 예술작품에서 이 작품의 순수한 동일성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라면, 작품 속에서 진행되는 의미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재료와 의도 사이의 과정이다. 동일시하는 원칙의 내재적 형태인 의도가 없다면 미메시스적 충동이 없을 경우와 마찬가지로 형식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재료가 물질이지만 곧 정신으로서 출발점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그리는 행위로서 “제작은 생각의 한 형태라는 믿음이다. 이 말은 창조의 특수한 사양과 개념적 전제가 서로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만들어 내기‘보다 ’일어나게‘하는 다양한 장치로서 목탄의 효과나 종이, 흔적, 인접성 이미지의 접합 등도 그런 차원이다. “예술가는 연장된 도구, 즉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전환을 위한 도구라고 칭할 수도 있다.” 인과성이 없이 목탄으로 그려지고 지워지고 흔적으로 드러나는 그리기란 우연성, 비의미성을 긍정하고 화면을 끝없이 확장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니었을까. “의미의 연관성 자체도 우연적인 것”이 듯.

작가가 사회와 무관할 수 없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 속해있는지 하는 것이 작품의 내용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물론 작품은 즉자가 아니라 의미체로서 객체이다. 의도가 작품의 내용을 형상화하지는 못해도 “한편 의도가 작품으로서 객관화되느냐 하는 문제는 비판의 목적이 될 수는 없어도 그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국내외의 사회정치적 문제나 기후 생태적 위기에 대응하는 의미로 작업을 읽어가는 동안, 그녀가 드러내려는 ‘사유 되지 않았던 것들’은 사라지길 원할 것이다.

허윤희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충족되는 것이며 하나의 체계로서 ‘전체화가 불가능’한 단편과 단편의 외재적인 관계가 생성변화 하는 것이다. 등장하는 소재들의 묘사는 그림 전체의 부분이지만 전체화에 저항하는 부분들로 의미화되고 감각화된 것이다. 경계의 저항 혹은 윤곽선의 경쟁이라는 말의 이면이기도 하다. 개체화가 불가피하면서 ‘분할 불가능’한 양가적 성격의 세계, 의도를 벗어난, 고정성에 맞서 반항하는 그리기이다.

“‘세계 안에는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뭔가가 있다. 이 뭔가는 어떤 근본적인 마주침(rencontre fondamentale)의 대상인 것이지 결코 어떤 재인의 대상이 아니다.’ 예상 밖의 이타성과의 마주침(=사건)에 있어서, 개개인은 상식‧양식에 안주하는 것으로 떼어내진다. 사유는 다름인 사건의, 그 재현 불가능성에 의해 견인(trigger)된다.” 그녀에게서 지스러기는 남겨진 어떤 것의 묘사된 형상이 아니라 손끝의 손거스러미가 일어나는 그런 촉감이다. 문제는 그런 촉감의 관성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먹어 치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말로 대신할 수 없는 그 민감한 촉감이야말로 허윤희 세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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