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의 그림이 사라진다… 저 달이 저물면
강수미(미술 비평)
TV 드라마가 즐겨 묘사하고 우리도 익숙한 ‘미술 전시장’이란, 눈부시게 흰 벽이 네모 반듯하게 서 있고, 그 벽과 동일한 사각형의 액자 씌운 그림들이 걸려 있는 공간이다. 미술이론가들은 이를 ‘화이트 큐브(white cube)’라고 부르는데, 감상자 대중은 그곳을 구경꾼처럼 휙 둘러보든 감동에 젖어 1시간 이상 체류하든, 거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나온다. 냉담할 정도로 깨끗이 단장된 장소 속 예술작품을 오직 눈으로만 향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안공간 사루비아다방에서 12월 19일까지 열리는 《허윤희 개인전―날들의 흔적》에서 양상은 전혀 딴판이다. 그렇다고 최근 유행하는 ‘관객 참여형 미술’을 기대하면 섣부르다. 이유는 이 전시가 전시공간에서 작가의 작품, 그리고 감상자의 입장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 경험한 흔적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1999년 처음 문을 연 이 대안공간은 옛날 인사동의 다방을 별 리모델링 없이 쓰고, 거기에 그간 다수의 작가들이 설치미술로 스쳐 지나갔기 때문에, 곳곳에 세월과 예술의 때가 덕지덕지 쌓여 있다. 공간 형태도 들쭉날쭉하고, 벽은 온통 검푸른 시멘트 상태 그대로다. 작가 허윤희는 이렇게 거친 공간에 지난 한 달 동안 상주하면서 오직 목탄만으로 거대한 전면 벽화를 완성해 냈다.
이렇듯 푸르스름한 전시장 벽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나 등장할 법한 온갖 내면의 형상들, 아니 그것을 있게 한 검은 목탄선들의 궤적으로 무거워져 있다. 한편 여기에는 우리 감상자의 시각만이 아니라 다른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다. 바닥에 소복이 쌓인 검은 목탄가루와 시멘트 조각들이 그것이다. 이 무척 가벼운 물질의 파편들은 물론 허윤희가 그간 작업한 예술의 흔적이다. 하지만 그 시간과 노고의 부산물은 벽화를 보기 위해 서성였던 나와 당신 같은 이의 신발창에 붙어 전시장 곳곳에 새로? ?몸의 흔적을 새긴다. 그 걸음걸음이 예술작품에 대한 내 경험의 구체적 지표가 되는 것이다.